기사입력시간 22.02.02 10:52최종 업데이트 22.02.02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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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링컨·모차르트 등 역사 속 명사들의 결혼생활, 알려진 이야기와 숨겨진 이야기

[칼럼] 장성구 한국의학교육평가원 이사장·전 대한의학회장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메디게이트뉴스] 사람들이 후세에 이름을 남기는 방법은 다양하다. 동양을 예로 든다면 공자는 현인과 도덕군자로서 이름을 남겨 인류역사에 우뚝 선 성인의 반열에 오른 스승이다. 요 임금이나 순 임금은 선정과 선행으로 후세에 이름을 남겼다. 그런가 하면 도척(盜跖)과 같이 상상할 수 없는 악행을 통해서 이름을 남기는 경우도 있다. 악행으로 이름을 남긴 것이 계획적이고 의도적인 것이었는지, 살다보니까 그렇게 됐는지 직접 물어본 사람이 없어서 알 수가 없다. 요즘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부정적이고 좋지 않은 내용이라도 이름과 얼굴을 알리기 위해 텔레비전에 나오기만 하면 좋아한다는 우스갯 소리도 있다. 황당한 헛소문일 뿐 전혀 아니길 바란다.
 
서양사에도 동양과 비슷한 일은 얼마든지 있다. 역사라는 거울 속에 투영된 명사들, 그리고 결혼 생활을 살펴보면 애환과 지혜를 동시에 얻을 수 있다. 결혼이란 스스로 만든 굴레 속에서 행복과 어려움을 추구하거나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서약식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Socrates) BC 5세기 와 크산티페(Xanthippe) 

크산티페는 남편의 언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항상 상스러운 말로 욕을 하는 등 남편을 경멸해 인류 역사상 악처의 대명사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그녀의 악처 노릇은 후세 사람들에 의해 과장됐다고 추정되기 때문에 악처로서의 행각의 정도는 확실하지 않다. 크산티페가 최고의 악처(惡妻)이었는지 아니면 소크라테스가 사상 최고의 악부(惡夫)였는지에 대한 논란은 많지만, 전해져 내려오는 것만큼 크산티페가 악처는 아니었다는 이야기가 좀 더 객관적이다. 
 
남편이자 사상가였던 소크라테스와 사고의 수준과 방향, 그리고 삶에 대한 생각이 부인 크산티페와 많이 달랐기 때문에 발생된 부부간의 갈등이 침소봉대됐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남편인 소크라테스의 위대함을 등에 업은 평가는 상대적으로 크산티페의 악명을 더욱더 악화시켰을 가능성이 있다. 
 
소크라테스가 사형(BC 399) 당했을 때 두 아들(소프로니스코스 와 메네크세노스)이 어렸다는 점에 비추어 재혼이든 만혼이든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컸을 것이다. 수신(修身)은 모르지만 제가(齊家)와 활발한 경제 활동을 통해 가장으로서 소크라테스의 역할이 컸을 것 같지는 않다. 이러한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해 보면 삶에 대한 내외간의 생각에 차이가 많이 있었을 것이라는 점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하고 분명한 것은 크산티페가 악처라는 것이 과장일 수는 있지만 현모양처는 아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크라테스는 위대한 철학자의 삶을 살았다는 점이다. 나아가 악처 덕분에 위대함이 좀 더 돋보였는지도 모른다.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 1809.02.12.~1865.04.15.)과 매리 앤 토드 링컨(Mary Ann Todd Lincoln, 1818.12.13~1882.07.16.)

에이브러햄 링컨의 부인(영부인) 메리 앤 토드 링컨은 경제관념이 없었고, 질투와 히스테리 증상이 심해 두 사람의 가정생활은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행복하지 못했다기 보다는 끔찍했었다는 표현이 좀 더 적절한지도 모르겠다. 메리 앤 토드가 소크라테스의 부인만큼이나 악처였다고 전해지고 있지만 사실 근거는 미약하다. 
 
가정에서의 삶이 거의 지옥이었기 때문에 링컨 대통령이 정치에 열중한 것이 아니라, 그가 정치에 너무 열중했기 때문에 가정생활에 소홀하게 됨으로써 메리의 성격이 일그러졌다고 생각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는 메리 토드의 옹호론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그녀에 대해 혹평하는 사람들도 상당하다. 미국의 작가 데일 카네기는 "에이브러햄 링컨이 암살된 것은 그의 결혼 생활에 비교하면 비극이라고 하기엔 부족하다"라고까지 극단적인 말을 하며 그녀의 추악한 성격을 몰아세웠다.
 
어쨌든 그녀의 삶 역시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링컨과 메리 토드는 4명의 아들, 로버트 토드 링컨, 에드워드 베이커 링컨, 윌리엄 월리스 링컨, 토마스 토드 링컨이 있었지만, 장남을 제외한 3명이 젊은 나이에 모두 사망했다. 그녀는 링컨의 암살 이후 정신이상을 초래해 64세를 일기로 죽을 때까지 정신 병원에서 보냈다.
 
불확실하지만 악처로 소문난 메리 토드와의 결혼 생활이 링컨으로서는 결코 행복하지는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이브러햄 링컨은 미국의 위대한 대통령이 됐다는 점이다. 그래서 남편하기 나름이라는 말이 있는지도 모른다. 링컨하기에 따라서 메리토드도 악처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지 모르겠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 1756~1791)와 콘스탄자 베버(Constanza Weber 1762.01.05.~1842.03.06)

피아니스트 안드라스 쉬프에 의하면 모차르트는 음악에서 예수님이다. 음악에 대한 귀족적 품격과 절제 능력 때문에 그의 열정적인 성격을 지나치는 수가 많다, 영화 아마데우스(Amadeus, 그의 그리스식 이름인 Theophilus의 프랑스식 표현인 Amade를 후세 사람들이 라틴어 표현인 Amadeus라고 함)에서 그를 유아적으로 그려 놓은 것은 감독의 무지 때문이라는 혹평은 여기에 근거한 것이다.
 
모차르트는 1778년 만하임(Mannheim)에서 음악가 집안의 딸인 알로이지아 베버(Aloysia Weber)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이들의 사랑을 우려한 그의 아버지 레오폴드(Leopold)는 어머니와 함께 파리로 갈 것을 명령한다. 1778년 파리에서 파리교향곡(Pari’s Symphony)를 쓰고 있던 중 어머니가 숨졌다. 모친의 병사에 충격을 받고 잘츠버그(Salzburg)로 귀환하는 길에 뮌헨(Munich)에서 알로이지아 베버를 만났을 때 그녀는 이미 다른 남자의 여인이 돼있었다. 
 
상심했던 모차르트는 1782년 8월 4일 아버지의 동의 없이 첫 사랑 알로이지아의 여동생인 콘스탄자 베버(Constanza Weber)와 결혼한다. 결혼 이후에도 모자르트는 지속적인 아버지와의 갈등, 아버지가 반대한 결혼 강행, 경제적으로 가족 부양에 대한 책임, 출생한 아이들의 어린 나이 사망, 살림을 전혀 모르는 아내의 문제, 매일 병치레 때문에 목욕만 다니는 아내, 계속 빚에 쪼들리는 생활 등 보통 사람들이 결혼 이후 평생 치르는 고통을 매일 매일의 일상 속에서 치른 사람이었다.
 
훗날 음악가 앨런 타이슨(Alan Tyson)은 모차르트의 막내 아들인 프란츠 크사버 모차르트(Franz Xavier Mozart)가 모차르트의 아들이 아니고 모차르트의 제자인 프란츠 크사버 쥐스마이어(Franz Xavier Sussmayr)와 콘스탄자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는데, 그는 네 가지의 이유를 제시했다.

 1. 쥐스마이어와 콘스탄자 두 사람은 바덴(Baden)에 자주 같이 있었다.
 2. 콘스탄자가 병 치료를 핑계로 자주 바덴(Baden)에 갔다.
 3. 막내아들이 1791년 7월 26일 태어났는데 1790년 10월에 모차르트는 여행으로 부인과 떨어져 있어서 임신을 시킬 가능성이 낮다. 
 4. 모자르트 사망 이후 콘스탄자의 두 번째 남편인 프란츠 자버 니에메체크(Franz Niemetschek)가 콘스탄자의 도움으로 쓴 모차르트 전기에 쥐스마이어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이름을 삭제했다.
 
한편 모차르트의 왕성한 성욕으로 그도 외도를 했을 가능성이 높고 실제로 이런 일로 두 내외는 자주 다퉜다. 모차르트가 경제적으로 파산을 하고 건강도 나빠졌을 때 콘스탄자가 자주 바덴으로 갈 때 모자르트는 그녀가 애인을 뒀다는 걱정을 하며 편지를 보냈는데, 그 내용 중에 “다른 사람들과의 행동에서 서로의 명예에 손상이 가지 않게 몸가짐을 조심하라”는 훈계가 있다.                      
 
언니와의 사랑은 결실을 이루지 못했고 동생인 콘스탄자의 삶 역시 결코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 모차르트 사망 후 콘스탄자는 니에메체크와 재혼했다. 그 이후 모차르트의 3대 오페라 중의 하나로 꼽히는 ‘마술피리(magic Flute)’가 대성공을 거둬 그녀는 부유하게 살 수 있었다. 모차르트의 악보도 팔고 관리하면서 경제적으로 여유 있게 50년을 더 살았다.(Constanza Weber 1762.01.05.-1842.03.06)
 
마술피리는 1791년 9월 30일 비엔나에서 초연된 오페라이다. 모자르트의 친구인 Emanuel Schikaneder가 극본을 쓰고 모자르트가 음악을 쓴 작품으로 초연 때부터 히트를 쳐서 지금까지도 가장 많이 상영된 5대 오페라 중에 하나다. 
 
음악에 대해 잘 모르는 필자가 오페라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이 마술피리의 성공으로 과부가 된 콘스탄자는 재혼도 하고 부자가 돼 여생을 즐겼고, 모차르트는 이 작품의 혜택을 전혀 보지 못했다는 아이러니를 말하는 것이다. 모차르트가 조금만 더 살았다면 얼마 동안이라도 지긋지긋한 가난과 빚에서 벗어나 천재 음악가로서 최소한의 대접과 부를 느렸을 수 있었다는 아쉬움이 크다. 어릴 때부터 허약했던 천재 모차르트를 제대로 챙기지 못한 이유 때문에 콘스탄자는 오늘날까지 소크라테스의 부인 크산티페만큼 악처의 오명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결혼에 이르지 못한 원인을 따져 물을 필요는 없다. 어쨌든 우리가 알고 있던 천재 모차르트의 결혼 생활은 여러모로 행복하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천재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해 음악에서의 예수님이라는 영광스러운 별칭을 받고 있다. 콘스탄자가 현모양처였다면 천재 모차르트의 삶은 좀 풍요로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악처와의 곤욕스럽고 외로운 삶 속 에서도 모자르트는 천재의 면모를 발휘하며 천재답게 살았다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하이든(Franz Joseph Haydn, 1732~ 1809)과 안나 마리아(Anna Maria) 
 

하이든은 교향곡의 아버지로 잘 알려져 있다. 과거에 우리나라에서는 하희돈(夏熙敦)으로 쓰이기도 했다. 다른 유명 작곡가와 달리 그는 오스트리아의 시골 로라우(Rohrau)에서 마차바퀴 제작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모든 작곡가들처럼 고용주인 귀족들의 부침에 따라 경제적인 상황이 좌우됐는데, 다행히 에스테르하지 공작의 배려로 그의 가문에서 30여년을 봉직했다. 이것은 하이든에게는 큰 행운이라고 봐야 한다. 어쨌든 우리가 알고 있는 하이든은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스승이다.
 
하이든은 비엔나에서 가발 만드는 집의 둘째딸인 테레제를 사랑했다. 그러나 테레제는 부모의 뜻에 따라 수녀원에 들어가 수녀가 됐다. 하이든은 그녀를 위해 '살베레지나(성모여 우리를 구하소서)'를 작곡했다. 수녀원에 보내기 전에 테레제의 아버지는 언니가 있는데 둘째를 먼저 결혼시킬 수 없다며 그 대신 큰딸과 결혼 할 것을 강요했다. 이 와중에 사랑하던 테레사는 수녀가 되기 위해 수도원으로 들어가고 하이든은 결국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큰 딸인 안나 마리아 알로지아 켈러(Anna Maria Aloysia Keller)와 결혼을 한다. 
 
부인 안나 마리아는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데다가 매우 드센 성격의 소유자이었고 낭비벽 또한 심했다. 하이든이 밤새워 작곡한 노트를 냄비받침으로 써버릴 만큼 무식했고 거기다 불임으로 거의 부부라고 말 할 수 없는 상태로 평생 살았다. 이는 하이든이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이혼을 못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종교적 신념으로 어정쩡한 삶을 살았으니 이 또한 큰 불행이다.
 
하이든은 생전에 안나 마리아를 “지옥에서 온 짐승”이라고 까지 불렀다. 부부간의 황당한 삶 때문에 하이든의 주위 사람들은 오히려 하이든이 외도하는 것을 도와줬다는 설이 있을 정도였다.
 
하이든 사후에 도난당했던 그의 두개골을 145년 만에야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은 하이든 본인은 물론 그의 조국 오스트리아의 큰 수치이자 수모였다. 유명 인사나 재벌의 유해를 도굴해 돈을 요구하는 패륜적 행위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간혹 있어왔다. 그러나 하이든 사건은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골상학 때문에 천재의 두개골을 연구하겠다는 자들의 소행이었고, 그것도 여러 차례에 걸쳐 하이든의 가짜 두개골이 비밀리에 거래되기도 했다.
 
하이든은 교향곡의 아버지라는 최고의 칭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부부의 삶을 살았다. 이들 부부는 삶이 아니었고 종교라는 끈에 얽매인 삶이었다는 말이 맞을 듯하다. 그의 출생으로부터 위대한 작곡가로서의 삶을 전체적으로 조명해 보면 그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모델이다. 물론 부인 문제만 빼고.

드보르작(Antonin Leopold Dvorak, 1841~1904)과 안나 체르마코바(Anna Cermakova)
 

드보르작은 체코슬로바키아 보헤미아의 작은 마을에서 정육점과 여인숙을 운영하는 서민의 가정에서 출생했다. 한편 보헤미아는 벤다, 뒤섹 등과 같은 훌륭한 음악가의 고향이기도 하다. 드보르작은 지극히 가난했기 때문에 돈을 벌어 집안에 도움을 주고자 아버지의 희망대로 정육기술자 자격증도 획득했다. 그러나 음악에 대한 열정을 버릴 수 없어 큰 아버지에게 도움을 요청해서 음악을 공부했다. 
 
프라하의 싸구려 하숙집을 전전하면서 피아노 가정교사 노릇을 했다. 여기서 금세공사의 두 딸인 소세피나 체르마코바와 안나 체르마코바를 가르쳤다. 소프라노 가수 지망생인 소세피나를 무척 사랑했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운 자신의 처지를 되돌아보면서 사랑을 고백하지 못했다. 결국 소세피나는 귀족인 카우니즈 백작과 결혼해 프라하를 떠난다. 이 실연의 아픔을 노래한 곡이 '측백나무'다. 
 
1873년 안나 체르마코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녀와 결혼을 강행했다. 결혼 이후에도 첫 사랑인 소세피나 하고는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고 음악가로 활동하는데 있어서 그녀의 남편인 카우니즈 백작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비록 위로 세 아이를 연속적으로 잃는 아픔이 있었지만 아내 안나와는 관계가 매우 좋았고 그 후 6명의 자녀를 뒀다. 알토 가수였던 부인 안나 체르마코바는 드로브작의 사랑이자 영감을 제공하는 원천 역할을 했다.
 
드보르작은 활동 면에서 영국과 인연이 깊었고 결국 캠브릿지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자기 조국 체코슬로바키아를 누구보다도 사랑했던 음악가다.
 
미국에 체류할 때 그의 첫 사랑이며 처형인 소세피나 체르마코바가 많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프라하로 돌아 왔으나 그녀는 이미 사망했다. 그녀를 위해 드보르작의 첼로협주곡 B단조의 마지막 67 소절을 그녀가 좋아했던 드보르작의 노래 'Leave me alone'을 삽입했다고 전해진다. 곡의 마지막은 심오한 평화와 체념 그리고 깊은 애정이 담겨져 있다.
 
드보르작 역시 첫 사랑의 인연이 결혼으로 이뤄지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동생과 결혼한 것이 인생에 큰 밑거름이 됐고 첫 사랑과도 인생 도반의 길을 잘 유지했다. 마치 동화 같은 이야기의 주인공이 됐다.

마치며: 결혼 생활은 역시 남편하기 나름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와 훌륭한 정치가 링컨 대통령은 부부간의 갈등과 원만하지 못한 결혼 생활을 했던 명사로서 역사적 증례로 남아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훌륭했던 링컨 대통령이 이렇게 불행한 결혼 생활을 했다는 것을 잘 모른다. 역으로 이점은 부부간의 문제는 개인이 짊어지고 가야하는 삶이고, 남편의 사회적인 역할은 그 나름대로 별개의 가치와 의의를 갖는다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모차르트, 하이든, 드보르작 세 음악가의 공통점은 모두 음악사를 뛰어넘어 인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만큼 위대한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아울러 이들의 또 다른 면은 첫 사랑 여인과 결혼을 하지 못하고 그녀의 여형제와 결혼을 했다는 공통점 때문에 필자의 글에 초대를 받았다. 그런데 모차르트와 하이든의 결혼 생활은 매우 불행했고 반대로 드보르작은 아주 성공적이었다. 이들을 보면서 결혼 생활은 역시 부인 뿐 아니라 남편하기 나름이라는 말이 결코 허언은 아닌 듯하다. 어깨가 무거워지는 남성들도 많을 것이라.
 
음악에 대해서는 완전한 둔재가 이글을 쓸 수 있었던 용기는 첼리스트이며 경희대 음대에서 정년퇴임을 한 이종영 교수가 지인으로서 보내준 저서 '심포니와 자곡가들(2021년)'과 '오페라와 작곡가들(2021년)' 두 권의 책을 정독한 것이 많은 도움이 됐다. 물론 이 두 권 책의 주된 내용은 음악과 음악사적인 전문적 정보를 담고 있다.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적인 의견이며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메디게이트뉴스 (news@medigat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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