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시간 23.07.01 09:15최종 업데이트 24.01.25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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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 저체온법을 이용한 개심술, 이성행 교수

[경북의대 100주년 칼럼] ㉖정한나 경북의대 흉부외과학교실 교수

경북의대 100주년, 새로운 100년을 위해  

2023년은 경북의대 전신인 대구의학강습소로부터 개교 100주년이 되는 해다. 경북의대는 한 세기 동안 훌륭한 의료인과 의학자를 배출한 한국의 대표적인 명문 의학 교육 기관으로 자리매김했으며, 지금까지 배출된 9000여명의 졸업 동문은 환자 진료 및 의학 연구에 매진해 국내외 의료 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다하고 있다. 이에 따라 경북의대는 2023년 8월 27일부터 9월 3일까지 100주년 기념주간으로 정하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메디게이트뉴스는 경북의대 100주년 기념사업 준비위원회와 함께 지나온 100년을 기념하고 새로운 100년을 준비하는 릴레이 칼럼을 게재한다. 

①권태환 경북의대 학장·경북의대 100주년 공동준비위원장
②박재율 경북대 의과대학 동창회장·중앙이비인후과 원장
③이재태 경북의대 100주년 자문위원단장·경북의대 핵의학교실 교수 
④김성중 경북의대 31대 동창회 수석부회장·대구 W병원 원장 
⑤김용진 경북의대 100년사 간행위원장·경북의대 병리학교실 교수
⑥이원주 경북의대 부학장·경북의대 피부과학교실 주임교수
⑦정한나 경북의대 흉부외과학교실 교수 
김성중 경북의대 31대 동창회 수석부회장·대구 W병원 원장
최병호 경북의대 소아과학교실 교수
⑩권정윤 경북의대 안과학교실 명예교수·뉴경대요양병원 원장
⑪김정용 대구 동구보건소장·전 개성공단 협력병원장
⑫이승재 경북의대 정신건강의학교실 교수
⑬채성철 경북의대 명예교수(순환기내과)
⑭정진향 경북의대 외과학교실 주임교수
⑮안동빈 경북의대 이비인후과학교실 주임교수 
⑯박순우 대구가톨릭의대 예방의학교실 교수·학장
⑰이원순 대구광역시의사회 명예회장
⑱박성민 대한의사협회 의장
⑲채종민 경북의대 법의학교실 명예교수 
⑳류형우 10대 대구예총 회장
손원수 경북의대 신경과학교실 교수 
박상운 대동병원 원장
김종연 경북의대 예방의학교실 부교수·대구광역시 공공보건의료지원단장
김재왕 대한의사협회 의료배상공제조합 대의원회 의장 

장유석 경상북도의사회 대의원회 의장 
㉖정한나 경북의대 흉부외과학교실 교수   
 
이성행 李聖行 Sung Haing Lee (1919-2012) 
역사적 관점에서 한국 흉부외과의 심장외과는 한국전쟁 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1950년대 들어 미국 문헌의 소개, 한국 전쟁에 참가했던 미국 군의관의 경험, 그리고 각 대학교수들의 미국 유학 경험에 힘입어 국내 심장외과 증례가 점차적으로 증가했다. 그리해서 이성행 교수는 1961년 9월 13일 한국 최초 저체온법을 이용한 개심술을 경북대병원에서 시행했다.
 
이성행 교수는 1919년 9월 14일 경남 창원에서 태어났다. 대구 계성고등학교를 졸업, 1942년 지금의 연세대 의과대학인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을 졸업했다. 1942년부터 동산기독병원에서 인턴을 했으며 1949년 지금의 경북대 의과대학 조교수로 부임했다. 이성행 교수는 고병간 교수의 문하생으로 1949년 5월 한국 최초의 전폐적출술을 도왔으며 이후 흉곽성형술, 폐절제술, 식도-위 문합술 등의 보조로 많이 참여했다.
 
1950년 6.25 전쟁으로 모든 대학병원이 육군병원으로 개편됐는데 고병간 교수와 이성행 교수만 병원에 남고 모든 외과 전문의는 군의관으로 편입됐다. 당시 선진국이었던 노르웨이, 덴마크, 미국, 스웨덴에서 군 의료인력 많이 파견했는데 덴마크와 미국에서 병원선을 보내 진료했고 한국 의사들을 위한 단기연수도 시행했다. 이러한 도움 덕분에 시대적 혼란 속에서도 한국 의사들은 단기간에 많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덴마트 병원선 Jutlandia호 

이성행 교수도 1952년에 2개월 동안 덴마트 병원선인 유틀란디아(Jutlandia)호에서 흉부외과 수련을 받았다. 당시 덴마크 병원선은 병실이나 수술실 등이 초현대식으로 설계돼 있었고 수술장비 또한 완벽했다. 전신마취가 돼 있는 환자의 개흉술을 이성행 교수는 처음으로 직관할 수 있었으며 그의 놀라움을 상상을 초월했다고 한다. 전쟁으로 인한 폐손상과 혈흉이 있는 환자들에 수술이 대부분이었다. 이성행의 교수는 덴마크 병원선에서의 2개월 흉부외과 수련이 흉부외과 전문의가 된 중요한 계기라고 했다.
 
1954년 한미재단 장학생으로 선발돼 조지워싱턴대(George Washington University), 피츠버그대(Pittsburgh University), 그리고 앨리게니 종합병원(Allegheny General Hospital)에서 흉부외과를 전공한 뒤, 1957년 경북대병원에 조교수로 귀국한다. 이성행 교수는 1957년 당시 경북대 의과대학 외과과장으로 취임했는데 1950년 후반부터 국내 대학병원과 국립의료원에 흉부외과가 설립되기 시작했다. 이 흐름에 발맞춰 이성행 교수는 이 때부터 외과와 흉부외과를 분리해 진료를 보기 시작했다.
 
1961년 9월 13일 한국 최초 저체온법을 이용해 개심술을 성공했다.
8세 심방 중격 결손 환아의 개심술 성공이 1961년 9월 23일 동아일보 신문에 실렸다.
1998년 제1회 한국 최초 개심술 기념 강연회를 개최했다. 당시 8세 환아가 건강하게 성인(가운데)이 돼 참석했고 이성행 교수 (맨 오른쪽)와 기념 사진을 촬영했다.

세계적으로 심폐기가 개발되기 이전인 1950년대 초, 심장수술을 하기 위해서는 1953년 Dr. F. John Lewis와 1945년 Dr. Henry Swan이 시행한 저체온법을 사용하거나 1954년 Dr. C. Walton Lillehei가 시행한 선천성 심장 질환을 가진 환아의 부모를 Biological Oxygenator를 이용하는 Cross-circulation 방법이 전부였다. 이성행 교수는 조지워싱턴대 유학 당시 Dr. Brian B. Blades 의 지도 아래 저체온법을 연구했는데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후 50여 마리의 개 실험을 통해 저체온법 수술을 계속 공부했다. 1961년 9월 13일 선천성 심방 중격 결손을 가진 8살 소년에게 저체온법 개심술을 한국 최초로 성공했다.

당시 이성행 교수의 나이가 42세 때의 업적이었다. 환자를 전신마취한 후 얼음물 속에 넣어 냉각, 체온이 33도일 때 환자를 얼음물에서 꺼내어 수술대 위에 눕히고 그 다음 가슴을 열고 심장을 노출하면 체온은 계속 하강해 29도에 머물게 된다. 30도 이하로 체온이 낮아지면 심실세동이 오기 때문에 이 온도를 유지하면서 혈류를 차단하고 심방중격결손을 봉합할 수 있었다.

1950-60년대에는 심도자검사법이 우리나라에서 활성화되기 이전이었는데 이 검사는 심장질환의 진단과 치료에 필수적인 검사법이었다. 이성행 교수는 앨리게니 종합병원 유학 당시 Dr. Edward Kent의 지도 아래 흉부외과를 전공했는데 흉부외과 수련 과정에 심도자검사법은 없었다. 하지만 후일 한국에서 개심술을 시행하기 위해서는 심도자검사가 절실했기에 Dr. Kent에게 심도자법을 배울 수 있도록 간청했고 앨리게니 종합병원 내 순환기내과 전문의 Dr. Donald Fisher에게 심도자법, 심혈관촬영법, 심음 청진법, 심전도 등을 배우게 됐다. 당시 심도자 측정기계는 4~5만달러가 소요되는 장비로 이성행 교수가 한국에 돌아간다 하더라도 병원에서 구입할 수 없을 것을 알았다.

 
이성행 교수는 한국에서 심도자 검사를 시행하기 위해 콘트롤박스(control box)를 조립해 귀국했다. (좌) 콘트롤박스를 심전도에 연결해 심장 내 압력을 파형 곡선으로 묘사하는 모식도이다. (우) 1958년 5월 실제 활로사징 환아에게 시행한 심도자 검사 기록이다.
이성행 교수는 미국 최초로 심도자검사법을 시행한 Dr. Fisher에게 ‘가장 값싼 장비로 심도자법을 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이에 Dr. Fisher는 심도자의 콘트롤 박스(control box)를 심전도계에 연결할 수 있다 했고 전자 부품을 사서 단돈 15달러로 콘트롤박스를 손수 조립해 주었다고 한다. 그는 귀국할 당시 미국에서 일회용으로 버리는 심도자 카테터 모아 콘트롤박스를 가지고 귀국했고 1958년 5월 활로사징 환자를 대상으로 한국 최초로 심도자법을 시행했다.
 
1964년 경북대 의과대학에 흉부외과학 교실을 창립했고 1968년 5월 18일 대한흉부외과학회 창립당시 창립회원이었다. 1971년 의대생과 약대생들로 구성된 아틀라스(Atlas) 클럽을 조직 지도하면서 무의촌 의료봉사를 했다. 또한,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으며 대구 YMCA 및 전국 YMCA 연맹 이사장을 지냈다.

제4대, 제12대 대한흉부외과학회 회장 및 제18대, 제19대, 제20대 경북대학교 병원장을 연임 후 1985년 부산 고신의대 학장으로 취임, 1987년에 퇴임했다. 슬하에 2남 3녀를뒀으며 장남과 차남은 의사로 각각 외과와 산부인과를 전공했고 손녀들 또한 의사로 3대에 걸쳐 의업을 이어가고 있다.
 
이성행 교수의 기록물  (좌) 1989년 흉부외과 소사 고희 자술 (우) 1998년 9월 12일 한국 최초 개심술 -회고와 전망-

필자는 뜻하지 않은 기회로 이성행 교수님의 일대기를 살펴 보게 됐다. 방대한 양의 자료와, 그리고 바쁘다는 핑계로, 1989년에 쓰신 '흉부외과 소사 고희 자술서'를 ‘굳이 읽어 보아야 할까?’ 라는 마음의 갈등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마음과 함께 책을 펼치게 됐다. 필자 또한 기독교인으로 하나님께서 개개인에게 준 달란트가 다름을 인정하고 주신 달란트와 소명 안에서 최선을 다해 노력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교수님의 자술서를 읽고, 특히 보통학교 시절과 장학생으로 계성학교 입학 공부를 한 이야기, 미국에서 심도자법 배운 이야기는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마음에 큰 울림이 있었다.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꼰대들의 라떼 이야기를 지겨워하거나 공감하기 어려울 때가 종종 있다. 하지만 교수님의 자술서를 읽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과연 저렇게까지 공부할 수 있었을까?’하고 나 자신을 한 번 더 반성하게 됐다.

 

메디게이트뉴스 (news@medigat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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