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시간 23.04.22 08:58최종 업데이트 24.01.25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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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택·박희명 교수, '두 개의 별'이 빛났던 경북의대 순환기내과

[경북의대 100주년 칼럼] ⑬채성철 경북의대 명예교수

경북의대 100주년, 새로운 100년을 위해  

2023년은 경북의대 전신인 대구의학강습소로부터 개교 100주년이 되는 해다. 경북의대는 한 세기 동안 훌륭한 의료인과 의학자를 배출한 한국의 대표적인 명문 의학 교육 기관으로 자리매김했으며, 지금까지 배출된 9000여명의 졸업 동문은 환자 진료 및 의학 연구에 매진해 국내외 의료 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다하고 있다. 이에 따라 경북의대는 2023년 8월 27일부터 9월 3일까지 100주년 기념주간으로 정하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메디게이트뉴스는 경북의대 100주년 기념사업 준비위원회와 함께 지나온 100년을 기념하고 새로운 100년을 준비하는 릴레이 칼럼을 게재한다. 

①권태환 경북의대 학장·경북의대 100주년 공동준비위원장
②박재율 경북대 의과대학 동창회장·중앙이비인후과 원장
③이재태 경북의대 100주년 자문위원단장·경북의대 핵의학교실 교수 
④김성중 경북의대 31대 동창회 수석부회장·대구 W병원 원장 
⑤김용진 경북의대 100년사 간행위원장·경북의대 병리학교실 교수
⑥이원주 경북의대 부학장·경북의대 피부과학교실 주임교수
⑦정한나 경북의대 흉부외과학교실 교수 
김성중 경북의대 31대 동창회 수석부회장·대구 W병원 원장
최병호 경북의대 소아과학교실 교수
⑩권정윤 경북의대 안과학교실 명예교수·뉴경대요양병원 원장
⑪김정용 대구 동구보건소장·전 개성공단 협력병원장
⑫이승재 경북의대 정신건강의학교실 교수
⑬채성철 경북의대 명예교수 

일제 강점기에 대구의전 내과학교실에는 당시 학장이던 야마네 세이지 교수를 비롯한 일본인 교수들과 한국인으로는 정하택, 최덕생, 배종호 등이 조교수로 재직한 기록이 있고 광복 당시에는 배종호 조교수와 이성관 전임 강사(나중에 예방의학 교실을 창설)가 근무하고 있었다. 
 
광복을 맞이하면서 야마네 세이지 교수가 인계 서류만 남겨둔 채 인수인계 절차 없이 황망히 대구를 떠나게 됐다고 한다. 당시 내과학교실의 배종호 교수를 학장으로 추대하려는 내부의 움직임이 있었다고 하나, 미군정청에서는 세브란스 의전(광복 직전 아사히 의전으로 개명된 상태) 출신의 외과 교수 고병간 박사를 학장으로 내려보냈다. 이에 따라 광복 이후 초창기에는 세브란스 의전 출신들이 대구 의전 교수진에 많이 합류하게 된다. 
 
1945년 10월에 대구의과대학으로 승격되고, 타지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근무하던 여러분들도 내과학 교실의 교수진에 합류했다.  초창기 교수들 중 필자가 같이 근무했던 분들은 교토 제국대학 출신의 소화기내과 정극수 교수와 대구 의전 출신으로 그 당시 부의무관으로 내과에 합류하셨던 박희명 교수이다. 나중에 내과학 교실에 합류한 혈액내과·핵의학을 전공하신 황기석 교수(대구의전 16회, 1948년 졸업)와 함께 이분들이 초창기 우리 내과학교실의 터전을 일구신 분들이라고 생각한다.
 
이후 전염병의 창궐, 6.25 전쟁의 발발 등으로 내과에도 많은 인적 변동이 있었고, 1952년 대구의과대학은 국립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으로 개편됐다. 그 후 1956년에 고병간 총장과 같은 세브란스 의전 출신으로 고총장의 신임을 받던 이규택 교수가 미국에서 병리학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해 내과학 교실에 합류하게 된다.

이규택 교수는 순환기학을 전공하던 학자들이 매우 적었던 당시에 대한 순환기학회의 발족(1957년)에도 참여하고 초대 부회장으로 선출됐고 1959년에는 회장에 취임하기도 했다. 이규택 교수는 미국 국립건강연구소(National Institute of Health, NIH)의 연구비를 받아 미국에서 연구하였던 동맥경화증에 대한 연구를 국내에서도 계속하게 된다. 
학위수여식에서 이규택 교수(오른쪽에서 두번째). 초창기 의과대학에서 학위소지자가 드물었고 특히 내과학 교실에서는 미국에서 PhD를 받은 이규택 교수만이 박사학위를 지도할 수 있었다. 

​한편 대구 의전에서 내과학 교실에서 근무하던 박희명 교수는 이규택 교수가 내과학 교실에 합류하기 직전인 1954년에 미국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당시에 해외로 반출이 허용된 미국 달러는 수 십달러 정도로 매우 적어서 다른 여러 방법으로 달러를 구해 생활을 꾸려나가야 했다는 얘기를 필자가 교수님께 직접 들은 적이 있다. 박희명 교수는 힘든 미국 유학 생활에서도 경비를 아끼고 아껴 귀국 당시에는 귀국 후 연구에 사용할 장비들을 사서 직접 들고 들어왔다고 한다.
 
박희명 교수 박사학위 사진(1961년). 이규택 교수만 가능했던 박사학위 지도를 박희명 교수도 할 수 있게 됐다.

박희명 교수가 미국 유학을 마치고 1958년 귀국했을 때는 1956년에 내과학 교실에 합류한 이규택 교수가 근무 중이었고 더욱이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규택 교수만이 학위 지도가 가능한 상황이었다.

이규택 교수는 미국 NIH의 연구비를 사용해 국내에서 많은 연구들을 진행 중이었고 연구 결과들을 외국 잡지에도 발표하고 있었다. 특히 육류를 섭취하지 않는 해인사 스님들을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할 때 나중에 조계종 종정에 오르신 청담 스님과의 일화는 유명하다. 스님들이 채식만 하는 데 혈액을 뽑으면 어떻게 하냐고 채혈을 않으려 하자, 당시 주지셨던 청담스님께서 “야야, 니가 중이 왜 되었노? 중생을 구제하려고 된 거 아이가, 우리가 피를 뽑으면 중생을 구제할 수 있다”하면서 당신이 먼저 채혈에 응한 후에 다른 스님들의 협조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규택 교수는 광복 이후에 자비 유학을 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부유했던 것 같고 1947년-1950년, 1953년-1956년 2회에 걸쳐 미국에서 공부한 소위 '서구 스타일'의 영어 잘하는 교수로 당시 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았던 모양이다.

당시 학생이었던 외과학 교실의 황일우 명예교수님의 정년 퇴임사에서 존경하던 교수님으로 이규택 교수를 꼽으셨다. 미국 학회에서 콜레스테롤과 식이에 관한 연구 결과를 발표할 때 콜레스테롤을 낮추려면 콜레스테롤 함량이 높은 계란노른자를 먹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마친 후 청중이 “그럼 계란 노른자는 어떻게 하냐?”라고 농담조의 질문을 하자, 바로 “노른자는 와이프에게 주라” 라는 농담으로 받았다는 일화도 있다 (외과 황일우 명예 교수님 전언) 
 
1958년부터 1960년까지의 기간이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한(1943년) 이규택 교수와 대구 의전을 졸업한 (1944년) 박희명 교수가 내과학교실에서 같은 순환기학(당시는 현재와 같이 내과가 분과가 되어있지 않았지만)을 전공하면서 함께 근무한 시기였다. 이규택 교수는 동맥경화증과 콜레스테롤 등의 연구에 관심이 있었고 박희명 교수는 미국 유학시절에 공부한 호흡생리, 심폐생리, 부정맥 등에 대한 연구에 관심이 있었다.

당시에 우리나라에서 동맥경화증은 먼 나라 얘기여서 이규택 교수의 논문에 의하면 당시 급성심근경색은 한 례도 없고, 심전도에서 과거에 심근경색을 앓았을 가능성을 암시하는 심전도 소견을 보이는 예가 수년간 몇 례 정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박희명 교수는 생리학 교실의 김대수 교수, 흉부외과 이성행 교수와 함께 심폐실을 운영하며 생리학적인 순환기 연구에 몰두하게 된다. 심폐실을 운영하였던 세 분 들 중 박희명 교수를 제외한 두 분은 모두 이규택교수와 같이 세브란스 의전 출신이었다는 점도 흥미롭다.

비슷한 연배의 이규택 교수와 박희명 교수 두 분의 관계가 내과 내에서 어떠했는지는 지금 알 길이 없다. 하지만 두 분과 관련해 전해지는 이야기들 중에 이규택 교수의 방에 이규택 교수가 미국에서 사온 심전도 기기가 있었던 상황에서 박희명 교수가 연구에 사용할 심전도 기기를 구하지 못해 애를 먹었다는 내용이 있었던 것으로 봐서 아주 막역한 사이는 아니었던 듯하다. 물론 두 분 모두를 생전에 따로 만나 뵌 적이 있는 필자가 직접 들은 바로는 두 분 모두 서로에게 특별히 나쁜 감정은 없다고 하셨다.

1980년대 중반 이규택 교수가 경북의대를 방문해 2층 중앙강당에서 특별 강연을 하고 박희명 교수를 만났다고 한다. 당시 필자는 군복무 중으로 두 분을 동시에 만나 뵙지는 못했다. 지금은 모두 고인이 되신 두 분이 이후 걸어가신 길은 전혀 달랐지만, 두 분 모두 자신의 분야에서 별이 되신 분들이라고 생각한다.  
 
1959년 내과학 교실에서 사용하던 심전도 교재

세계적인 동맥경화증 연구자 이규택 교수
 
이규택 교수는 1960년 4.19 학생의거 이후 여러 복잡한 학내 사태에 따라 학교가 휴교 조치되고 교수 전원이 사표를 내어야 하는 상황에서 강제로 사표를 내게 된다. 휴교가 풀린 후 새로이 구성된 집행부의 선별적인 재임용 과정에서 이규택 교수는 재임용되지 못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이후 뉴욕의 주도인 올바니(Albany)시에 소재한 올버니의대(Albany Medical College)의 병리과(Department of Pathology)에 자리 잡고 과거부터 같이 연구하던 윌버 A 토마스(Wilber A Thomas) 박사와 함께 동맥경화증 연구에 몰두해 실험병리학(Experimental pathology)과를 만들고 일가를 이루게 된다.

임상의학인 내과가 아닌 기초의학인 병리학을 택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미국에서 자리를 잡은 후 바로 경북의대 내과학 교실 재직 당시에 연구원으로 같이 연구하던 김동낙 등을 비롯한 많은 모교 출신들을 미국으로 불러들여 지속적인 연구를 하게 된다.
 
대한순환기학회에서 처음 발간한 심전도 교재(1959년)에 이규택교수가 공저자로 참여했다.

동맥경화증의 연구에는 사람과 식성이 비슷하고 동맥경화증의 발생의 병태 생리가 비슷한 돼지를 사용하는데, 당시에도 돼지의 가격이 높아 잘 사용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하지만 이규택 교수 연구실에는 미국 NIH의 연구비가 상당히 풍족했던 모양으로 가장 많을 때는 사육하는 실험용 돼지가 300 마리에 이른 적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의 연구결과들을 유수한 국제 잡지들에 많이 발표했음은 물론이다.

발표된 연구들을 살펴보면 아프리카 등의 후진국들과의 공동 연구도 눈에 띈다. 내과학교실 초창기에 연구했던 미군들과 대구 시민들에 대한 비교연구 등과 같은 연구를 우리나라 사람들을 대상으로 할 수 없었던 아쉬움이 발현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규택 교수가 퇴임하고 나서 미국 뉴욕주의 올버니의대의 당시 실험실을 들른 적이 있는데, 연구원들 얘기로 동맥경화증의 발생에 대한 가설로 “Response to injury Hypothesis”를 발표해 유명해진 루셀 로스(Russell Ross)가 동맥경화증에 대해 배우러 온 적도 있다고 자랑했던 기억이 있다. 돼지의 동맥에 동맥경화증을 유발시키기 위해 풍선으로 혈관벽에 손상을 주는 모형을 포스터로 제작해 전시해 놓은 것을 본 것이 기억에 남는다.

불행히도 이규택 교수의 활동시기에 경북의대와는 교류가 없었고, 주로 일본 학자들과 교류가 있었던 것 같다. 대표적으로 일본 동경의 도쿄의과치과대학 제3 내과의 주임교수인 후지오 누마노(Fujio Numano) 교수가 있다. 누마노 교수가 타카야수(Takayasu) 동맥염에 대한 연구를 문부성 연구비로 진행할 때 우리 나라와 공동연구를 하도록 이규택 교수가 독려해 서울대병원의 박영배 교수와 경북대병원의 필자가 참여하는 회의를 서울에서 이규택 교수와 함께 한 적이 있었다.
해인사 승려들이 중생들을 구제할 목적으로 참여하여 완성한 논문이 1962년 Archives of Environmental Health에 실렸다.

필자는 이 모임에서 이규택 교수를 처음 만나 뵈었는데 듣던 바대로 영어를 잘 하시는 멋쟁이 노교수님이셨던 기억이 있다. 이 모임에서 연구에 대한 얘기가 오간 얼마 후 이규택 교수의 건강이 나빠져서 공동 연구를 지속할 수 없게 돼 필자로서는 매우 아쉬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대한민국 순환기내과의 개척자 박희명 교수 

학내 분규 이후에 교실에 재발령을 받았던 박희명 교수는 미국 유학 후 모교 내과학 교실에서 폐기능 검사와 심전도 검사 등 소위  'Mechanocardiography'를 활용한 연구를 하며 30대 후반에 시작한 내과 과장 및 주임교수를 거의 정년 퇴임할 때까지 유지했다. 재임 중 내과학교실의 발전(특히 순환기내과 및 호흡기내과) 그리고 우리나라 순환기학회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미국에서 귀국할 때 자비로 사서 가지고 들어온 3개의 비단실로 짠 심도자를 사용해 선천성 심장병환자에서 처음으로 우심도자를 시행한 업적이 있다(1958년). 불행히도 당시 심도자를 하고 나면 심도자내에 끼어 있던 (아무리 씻어도 없어지는 않는) 혈전 때문에 매번 열이 나서 애를 먹었고, 이러한 부작용이 생겨 몇 명 밖에 하지 못하고 심도자를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1967년 박희명 내과 주임교수 겸 병원 내과 과장

우리 나라 심장병의 진료에 심도자를 가장 먼저 시작한 병원 중의 하나였던 경북대병원 순환기내과에서 다시 심도자술을 진료에 사용 가능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1980년대 초반이었다. 당시 국립대병원에 EXIM 차관으로 여러 기자재가 들어오게 되어 부족한 여건에서 진료하였던 의료진의 숨통을 틔워주었다. 

재임 중에 교육, 연구 및 진료에 많은 업적을 냈을 뿐만 아니라 내과를 연구 및 진료 단위별로 분과로 나누는 등의 선구자적인 안목을 실천하기도 했다. 학회활동으로 대한순환기학회의 회장을 맡기도 하였고, 경북대병원장, 경북대 의과대학 학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재임 중에는 자기 관리가 엄격하고(흡연에서 만큼은 예외?) 대단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내과를 주도해 여러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회진 중 날카로운 질문에 답하던 전공의가 실신하기도 했고, 젊은 교수들의 퇴근을 방해한(?) 사건도 내과 의국원들 사이에 회자되기도 한다.

현재의 병원 본관 박물관을 마주 보는 방에 연구실을 정하고 아침 신환의 회진 보고를 받기도 하고 또 논문을 집필하기도 하면서 밤늦게까지 연구실에서 연구했다. 막다른 복도 끝에 연구실이 위치한 젊은 전임강사가 박희명 교수가 퇴근하기 전 밤 10시 이후에 발꿈치를 들고(?) 조심스럽게 퇴근하는데, 미세한 발자국 소리도 놓치지 않고 있었던 박희명 교수가 방문을 열고 “닥터 O”하고 소리쳐서 퇴근을 못하게(?) 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었는데, 젊은 교수들과 달리 박희명 교수는 병원에서 지척의 거리에 있는 삼덕동 교수 관사(지금의 삼덕동 기숙사 위치)에서 살고 있어 통행금지가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박희명 교수는 논문을 작성할 때 8절 갱지에 한 줄씩 띄어서 교정할 부분을 남겨두고 큰 글씨로 한자를 섞어 연필로 직접 쓰게 하였다.
(호흡기내과교수를 역임한 이장백 동문 제공) 

박희명 교수는 워커홀릭으로 유명해 본인은 휴가가 없었던 듯하며 지도 학생이나 전공의들이 휴가 가는 것도 이상하게 생각했던지, 필자가 1-2년차 전공의 시절 “언제부터 휴가입니다”라고 보고하면 잘 다녀오라는 말 대신에 "휴가이면 환자를 보지 않고 종일 논문일 할 수 있겠네“ 하면서 더 많은 과제를 주셨던 기억이 있다.

논문을 지도할 때 교정을 수십 차례 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8절 갱지(누런 빛깔의 재생용지, 현재의 A3 비슷한 크기)에 한 줄씩 띄어서 교정할 부분을 남겨두고 큰 글씨로 한자를 섞어 연필로 직접 작성하게 했다. 이 원고를 가지고 원고 작성자 (대체로 전공의)와 연구실에 앉아서 몇 시간씩 교정을 하고 수정본을 다시 필사하게 하고 다시 수정하는 것을 반복적으로 수 차례(~10여 차례 까지) 거친 후에 200자 원고지에 옮겨 쓰게 했다.

필자는 전공의 3년간 수 편의 논문과 여러 편의 짧은 논설, 군의관 근무 시절 한편의 종설을 함께 작성한 적이 있는데 이 반복되는 필사 작업이 몹시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이 필사는 작성자의 공부에 도움이 되도록 매번 직접 쓰는 것을 원칙으로 했는데 어느 해 모 전공의가 이 필사를 다른 사람을 시켜 대신하게 했다가 박희명 교수를 대노케 해 몹시 혼났다는 일화가 있다.

현재의 잣대로 보면 너무나 독재적인 운영 방식이지만 그 당시에는 박희명 교수 휘하에서는 너무 당연한 일로 여겼던 듯하다. 물론 퇴임 수년 전부터는 이런 방식이 많이 완화됐다고 한다.
 
박희명 교수 회갑 기념 사진. 내과학 교실에서 처음으로 박희명 교수가 회갑 그리고 5년 뒤 정년퇴임을 하게 돼 두 행사를 모두 성대하게 치렀다. 

박희명 교수는 정년 퇴임 후에 약리학교실에서 퇴임하신 김종석 교수가 운영하던 시내의 모 스포츠 플라자의 의무실에 근무하게 됐다. 여기서도 연구에 대한 열정이 식지 않았고 일반인들 뿐만 아니라 엘리트 스포츠 선수들을 대상으로 수많은 심폐운동부하검사를 시행해 여러 논문들을 발표했다.

필자에게도 자료들을 많이 가져오셨는데, 대상자들을 너무 열심히 운동을 시킨 때문인지 외국 자료들과 비교했을 때 우리 나라 사람들의 심폐기능이 월등히 뛰어난 것으로 나타나 해석에 어려움을 겪은 적도 있다. 아마 평소의 원칙대로 검사 대상자들을 다그쳐서 운동을 너무 무리하게 시킨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정년 퇴임 후 스포츠센터 의무실에서 근무한지 만 10년이 지났을 때 우리가 잘 아는 IMF 사태가 생겨 모두가 어려운 상태가 됐고 근무하던 스포츠센터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 시기에 스포츠센터의 소유주인 김종석 교수는 계속 근무해도 괜찮다고 했으나, 자진해서 “나를 10년 동안 근무하게 해줬으니 감사합니다. 이 어려운 시기에 나부터 자르십시오”라고 말하고 미련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아마도 자기 관리에 철저하고 염치를 알고 솔선수범했던 평소의 인품이 그대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던 것 같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고 하지만 만약 순환기 및 동맥경화증 분야의 빛나는 별이 되신 이 두 분께서 우리 내과학교실에 함께 계셨다면 한 분은 순환기 질환의 생리학적인 방면의 연구를 하고, 한 분은 동맥경화증에 대한 연구를 하며 경북의대와 경북대병원 내과학교실의 발전에 더 많은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부질없는 상상을 해보게 된다.  


 

메디게이트뉴스 (news@medigat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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