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시간 23.04.15 10:22최종 업데이트 24.01.25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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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교수님들과 함께 만들어온 경북의대 정신건강의학교실 60여년의 역사

[경북의대 100주년 칼럼]⑫ 이승재 경북의대 정신건강의학교실 교수

경북의대 100주년, 새로운 100년을 위해  

2023년은 경북의대 전신인 대구의학강습소로부터 개교 100주년이 되는 해다. 경북의대는 한 세기 동안 훌륭한 의료인과 의학자를 배출한 한국의 대표적인 명문 의학 교육 기관으로 자리매김했으며, 지금까지 배출된 9000여명의 졸업 동문은 환자 진료 및 의학 연구에 매진해 국내외 의료 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다하고 있다. 이에 따라 경북의대는 2023년 8월 27일부터 9월 3일까지 100주년 기념주간으로 정하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메디게이트뉴스는 경북의대 100주년 기념사업 준비위원회와 함께 지나온 100년을 기념하고 새로운 100년을 준비하는 릴레이 칼럼을 게재한다. 

①권태환 경북의대 학장·경북의대 100주년 공동준비위원장
②박재율 경북대 의과대학 동창회장·중앙이비인후과 원장
③이재태 경북의대 100주년 자문위원단장·경북의대 핵의학교실 교수 
④김성중 경북의대 31대 동창회 수석부회장·대구 W병원 원장 
⑤김용진 경북의대 100년사 간행위원장·경북의대 병리학교실 교수
⑥이원주 경북의대 부학장·경북의대 피부과학교실 주임교수
⑦정한나 경북의대 흉부외과학교실 교수 
김성중 경북의대 31대 동창회 수석부회장·대구 W병원 원장
최병호 경북의대 소아과학교실 교수
⑩권정윤 경북의대 안과학교실 명예교수·뉴경대요양병원 원장
⑪김정용 대구 동구보건소장·전 개성공단 협력병원장
⑫이승재 경북의대 정신건강의학교실 교수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100주년을 기념해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정신건강의학교실이 기틀을 잡게 되기까지의 초창기 역사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1950년대 후반, 지독한 가난과 전쟁보다도 무서운 이념 및 계층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아픈 이들을 돕고자 하는 일념으로 교실의 틀을 만들어 주신 모든 교수님들께 지극한 존경의 마음으로 이 글을 올립니다. 이 글은 2017년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정신건강의학교실 개설 60주년을 맞아 대대적으로 정리한 교실 60년사를 토대로 했습니다. 이하 표현의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존칭은 생략했습니다. 

1. 마침내 교실을 열다 (1957-1960)

경북의대 신경정신의학 교실이 창설된 것은 1957년으로 소주영 전임강사(경성제국대학 1944년 졸업)와 최경홍 조교(경북의대 26회 1958년 졸업)가 초창기의 교실 설립에 크게 공헌했다. 소주영은 1957년 3학년과 4학년을 대상으로 한 정신의학 강의를 개설했다. 1958년 2월 소주영은 정식으로 전임강사로 부임했으며, 1958년에는 3학년은 강의, 4학년은 임상실습으로 분화됐다. 1958년 최경홍은 졸업과 동시에 조교로 근무하면서 외래와 병실에서 환자 진료를 도맡았으며, 임상실습과 학생강의에도 힘을 보탰다. 당시 외래 진료실은 병원본관 하층 69호실이었으며, 병실은 25병상 규모로 본관 뒤쪽의 독립된 건물인 감염병동의 2층이었다. 
 
사진 왼쪽 소주영(1957-1969) 오른쪽 최경홍(1958-1961)

2. 교실에 숨을 불어 넣다 (1961-1975) 

1960년 말에 당시 수도의대(현 고려의대)에 정신과 과장으로 근무하던 이동식 임상교수(대구의학전문학교 10회 1941년 졸업)가 경북의대 교수로 모교에 부임하게 됨과 아울러 1961년에 정창용 조교(경북의대 21회 1953년 졸업)가 부임하면서 교실분위기에 일대 혁신을 가했다.
 
사진 왼쪽 이동식 (1960-1963)  오른쪽 정창용 (1961-1962)

이동식은 경성대학 의학부(현 서울의대)에서 신경정신의학을 수련하고 한국전쟁 통에 대구로 피난해 지내다 1954년 7월 도미해 뉴욕대 정신의학 전공의, 윌리엄 엘런스 화이트(William Alanson White) 정신분석연구소, 체로키(Cherokee) 정신보건원, 켄터키(Kentucky) 주립중앙병원 등에서 4년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1958년 말 귀국한 후였다. 정창용은 1958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레터만 군병원 견학 후 귀국해군의관으로 추가 근무를 마치고 제대한 후였다.  

이동식 주임교수는 경상북도 안동, 포항, 김천의 도립병원에서 무료진료소를 열고 진료와 정신의학 계몽에 힘썼는데,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역학연구로 여겨진다. 또한 몸과 마음이 뗄 수 없는 관계임을 직관하고 일찍이 내과와 공동으로 정신신체의학 케이스 컨퍼런스(Psychosomatic case conference)를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환자의 내면세계에 대한 이해, 대인관계의 역동, 인간주의적 환자 치료의 기본 초석을 마련했으며 이는 경북의대 정신건강의학교실의 근본 가치가 됐다. 

그러나 정창용이 1962년 일신상 사정으로 사임했고, 1963년 4월 이동식도 불가피한 사정으로 현직을 사임하게 됐다. 이후 소주영이 1969년 사임 때까지 주임교수로 있었다. 이 시기 입원진료에서는 약물치료와 함께 전기충격요법와 인슐린 유도 혼수 치료가 꾸준히 실시됐고, 외래는 늘어난 환자를 수용하기 위해 1963년 증축된 본관 동편 외래진료소로 이전했다. 

사직한 소주영 후임으로 1970년 2월 미국 예일대학 정신과 박사후 과정(postdoctoral fellow)에 있던 이시형(경북의대 27회 1959년 졸업)이 전임강사 발령을 받고 교실을 맡았다. 같은 해 여름 강석헌 전임강사(경북의대 30회 1962년 졸업)가 해군 복무를 마치고 발령을 받아 교실의 새로운 출발의 계기가 됐다. 또한 1971년에는 윤석하(경북의대 30회 1962년 졸업)가 전공의 수련을 마치고 바로 전임강사로 남게 됨으로써 이시형, 강석헌, 윤석하 세 사람이 교실에서 교직자로 역할을 하게 됐다.

이시형은 집단정신치료, 정신건강과 문화적 차이 또는 사회적 문제와의 관계에 주로 관심을 보였다. 전국 최초로 일반인을 대상으로 대학 강당에서 정신건강(mental hygiene) 강의를 했다. 윤석하는 서울대병원에서 뇌파를 수학하고 돌아와 본원 최초로 뇌파실을 설립했으며, 당시 신경과가 개설되지 않은 상황에서 신경과 교육과 진료에 힘썼다. 
 
이시형 교수와 정신과 병동 회진(1972년 학생 졸업앨범 사진)
 
윤석하 교수의 학생 뇌파교육 장면(1974년 학생 졸업앨범 사진) 

3. 세 명의 거인 교실의 기둥을 세우다 (1976-1990)

1976년 초에 이시형 조교수가, 1980년에 윤석하 부교수가 일신상 사정으로 사임을 했다. 1976년 이시형 조교수 퇴임 후 강석헌 조교수가 주임교수직을 맡게 됐고 같은 해 9월에 강병조 전임강사(경북의대 36회 1968년 졸업)가 발령을 받았다. 1978년 5월에는 스위스 취리히 융연구소 분석가 과정을 졸업하고 융학파 분석가 디플롬을 취득 후 귀국한 직후였던 이죽내(경북의대 33회 1965년 졸업)가 조교수로 발령을 받아 교실에 재직하게 됐다. 
강석헌 (1970-1997) 
강병조 (1976-2009) 
이죽내 (1978-2005)

강석헌은 1976년 초부터 교실내외 합동으로 정신치료에 대한 연구, 토론을 활발하게 이어갔다. 이런 노력이 실현된 데는 교실을 떠났지만 당시 한국정신치료학회 회장과 부회장이었던 이동식과 정창용의 후학양성을 위한 숭고한 헌신이 있었다. 1976년 8월에 신경정신의학교실 동문회가 결성됐으며, 1977년 9월 동문회 후원으로 오디오시스템이 구축됐고 교실 내 정신치료연구실이 개설됐다. 1978년 10월에 강석헌 부교수는 2년간 미국의 마운트사이나이(Mount Sinai)의대 및 뉴욕의 컬럼비아(Columbia)의대 정신과에 수학했다. 1978년 말 구관 정신과 병동에서 신관 C병동 2층에 35병상의 병동으로 옮기게 됐다. 현재까지 두 차례의 큰 개보수가 있었으나 지금도 동일한 장소에서 환자를 보고 있다. 

강석헌은 1980년대에 한국정신치료학회의 핵심멤버로 활동하면서 이동식의 지도하에 한국전통사상인 도(道)와 서양의 현대적인 정신치료와의 접목을 시도했고 한국정신치료학회를 통해 세계 각국의 정신치료자에게 한국의 도를 보급하는데 부단히 노력했다. 특히 1985년 10월 유고슬라비아 오파티야(Opatija)에서 개최된 제13차 국제정신치료학회(IFP)에서 현존재분석의 전문가인 M. 보스(M. Boss)와 함께 ‘Psychotherapy: East and West’라는 심포지움을 조직하고 ‘선사와의 대화’라는 연제를 발표했으며 학술공로상과 메달을 수여받았다. 
국제정신치료학회에서 이동식(전열 우측), M. Boss(전열 중앙), 강석헌(후열 우측), 이죽내(후열 중앙)
경북의대 동창회보에 실린 국제정신치료학회 참석 기사

이죽내는 1980년대에 3차례 스위스에 연수를 다녀오며 현존재분석과 융의 분석심리학에 대한 학문적 깊이를 더했다. 1981년과 1985년 두 차례 각 1년간의 유학을 통해 스위스 취리히대학교 철학 제1부 철학석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현존재분석연구소에서 현존재분석가 디플롬을 받았다. 1989년 동 기관에서 다시 1년 더 수학해 ‘융 심리학에 있어서의 이해의 본질적 의미’라는 논문으로 동 대학교 철학1부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 기간에 취리히 현존재분석연구소장인 기온 콘드로(Gion Condrau) 교수와 1990년에 창립될 ‘국제 현존재분석학회’에 관한 협의를 하고, 독일 프랑크푸루트대학교 정신분석연구소장인 피터 쿠터(Peter Kutter) 교수와 만나 서독과 한국의 정신의학자 및 정신치료자들 간의 상호 학술 교류에 힘썼다. 

1983년 12월부터 다자인 아날리스(Dasein Analyse)의 학술고문으로 활동했고, 1984년 제3차 환태평양 정신의학자대회(PRCP)에서 ‘Reality in Eastern sŏn and Western psychotherapy’, 1988년 10월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국제정신치료학회(IFP)에 ‘서양 정신치료의 한국 문화와의 동화’를 발표했다. 1989년 12월 미국 플로리다에서 열린 미국정신분석학회(AAP) 학술대회에 참석해 ‘유교와 정신치료’란 연제를 발표했고, 이때 미국정신분석학회의 추천으로 이 학회의 Scientific associate member로도 임명됐다. 
이죽내 교수 연수 길 기차역 배웅(1981)

강병조는 1983년 4월에 조교수에서 부교수로 승진하고, 같은 해 7월에서 1984년 6월까지 미국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의대 생물정신의학 분과에서 우울증의 생물학에 대해 연수했다. 1년간의 연수 후에도 생물정신의학에 대한 관심과 연구를 지속했는데,  가장 두드러진 활동으로 1985년도 2월 ‘생물정신의학연구회’(1985. 1. 24 창립)와 ‘대한정신약물학회’(1985. 2. 28 창립)의 창립을 주도했다.

국제활동으로는 1985년 9월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제4차 세계생물정신의학회(WFSBP)에서 U. Halbreich와 공동집필한 ‘Some factors influencing the growth hormones response to desmethyl imipramine and other pharmacological stimuli’를 발표했고, 1986년 4월 도쿄에서 열린 환태평양 정신의학자대회(PRCP)에 참석해 ‘HLA antigen of chronic schizophrenic patients and their family members’의 연제를 발표했다. 1987년도 11월 홍콩에서 개최된 환태평양 정신의학자 대회(PRCP)에 참석해 ‘한국인 정신분열증 환자와 조울증 환자의 HLA’란 논문을 발표했다.

국내에서도 대한신경정신의학회 및 각 방면의 연구학회를 통해 연구 발표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특히, 1987년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추계학술대회에서 강병조와 임효덕 전공의의 ‘만성정신분열증 환자와 그 가족의 인간조직적합성 항원’이란 논문이 전국 최우수 논문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다.
 외래 앞에서 강석헌, 강병조 교수

1990년 이후 퇴임까지 강석헌, 이죽내, 강병조 3인은 각자의 분야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수행하면서 교실의 발전과 분화에 전력을 다했으며 현재 교실의 골격을 완성했다. 지금도 이죽내, 강병조 명예교수는 연구와 진료를 지속하고 있으며, 마지막까지 정신치료자 양성에 힘써왔던 강석헌 명예교수는 2022년 10월 6일 지병으로 타계했다. 고인이 애장하는 자작 한시를 소개하며 고인의 넋을 기린다.
 

메디게이트뉴스 (news@medigat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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