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시간 23.05.07 09:45최종 업데이트 24.01.25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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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의대 예방의학교실을 창설하신 故 벽은(碧隱) 이성관(李性寬) 교수님을 추모하며

[경북의대 100주년 칼럼] ⑯박순우 대구가톨릭의대 예방의학교실 교수·학장

경북의대 100주년, 새로운 100년을 위해  

2023년은 경북의대 전신인 대구의학강습소로부터 개교 100주년이 되는 해다. 경북의대는 한 세기 동안 훌륭한 의료인과 의학자를 배출한 한국의 대표적인 명문 의학 교육 기관으로 자리매김했으며, 지금까지 배출된 9000여명의 졸업 동문은 환자 진료 및 의학 연구에 매진해 국내외 의료 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다하고 있다. 이에 따라 경북의대는 2023년 8월 27일부터 9월 3일까지 100주년 기념주간으로 정하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메디게이트뉴스는 경북의대 100주년 기념사업 준비위원회와 함께 지나온 100년을 기념하고 새로운 100년을 준비하는 릴레이 칼럼을 게재한다. 

①권태환 경북의대 학장·경북의대 100주년 공동준비위원장
②박재율 경북대 의과대학 동창회장·중앙이비인후과 원장
③이재태 경북의대 100주년 자문위원단장·경북의대 핵의학교실 교수 
④김성중 경북의대 31대 동창회 수석부회장·대구 W병원 원장 
⑤김용진 경북의대 100년사 간행위원장·경북의대 병리학교실 교수
⑥이원주 경북의대 부학장·경북의대 피부과학교실 주임교수
⑦정한나 경북의대 흉부외과학교실 교수 
김성중 경북의대 31대 동창회 수석부회장·대구 W병원 원장
최병호 경북의대 소아과학교실 교수
⑩권정윤 경북의대 안과학교실 명예교수·뉴경대요양병원 원장
⑪김정용 대구 동구보건소장·전 개성공단 협력병원장
⑫이승재 경북의대 정신건강의학교실 교수
⑬채성철 경북의대 명예교수(순환기내과)
⑭정진향 경북의대 외과학교실 주임교수
⑮안동빈 경북의대 이비인후과학교실 주임교수 
⑯박순우 대구가톨릭의대 예방의학교실 교수·학장

필자는 1987년에 경북의대 예방의학교실에 입국해 전공의 과정을 수료했다. 당시에는 이성관 교수님께서 정년퇴임을 하신 이후라 의국에서 뵐 기회는 없었지만, 학생 시절에 지역사회의학과 일차보건의료에 대해 열정적으로 강의하시던 모습은 생생하게 기억난다. 학생 시절에 예방의학을 전공하기로 이미 결심했기에 경북의대 예방의학 원조 교수님의 강의를 특히 관심 깊게 들었던 것 같다. 이성관 교수님은 정년퇴임 이후에도 학술 활동을 계속하셨는데, 특히 70세가 넘은 연세에 산업의학회 학술대회에서 구연하시던 모습은 당시 갓 전문의를 따고 학자로서의 걸음마를 시작하던 필자에게는 거의 충격에 가까웠고 평생 귀감이 됐다.

필자가 대구가톨릭의대에 발령받은 후 수년간 모 근로자 건강검진 기관에 지원을 나간 적이 있었다. 당시 거기에 근무하고 계셨던 이성관 교수님께서 소음성 난청에 관한 데이터를 주시면서 논문을 써보라고 하셨던 기억이 있다. 그때가 작고하시기 불과 몇 달 전이었다.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평생 학문을 손에서 놓지 않으셨던 이성관 교수님을 경북의대 예방의학 교실의 창설자로 모시고 있음은 우리 교실의 자랑이며, 또한 모교 개교 100주년에 즈음해 그분의 일대기를 기고하게 돼 매우 영광으로 생각한다.

필자가 소개하는 내용 대부분은 이성관 교수님의 제자이자 필자의 은사이신 故 김두희 교수님께서 평소에 정리해 놓으신 글에서 따온 것임을 밝혀둔다. 그 외 이성관 교수님의 회갑기념 논문집 등 관련 자료를 참고했다. 혹시 필자의 무지(無知)와 필력(筆力)의 부족으로 인해 이성관 교수님의 명성에 누를 미치는 일은 없을지 두려움에 조심스럽게 글을 시작했다.
 
1960년 이성관 교수 연구실 집무 모습

벽은(碧隱) 이성관(李性寬) 교수는 이경록 공과 정선이 여사의 7남매 중 3남으로 1918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대구농림학교를 거쳐 1941년에 대구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경성제대 의학부에서 내과학을 전공했다. 1943년부터 대구의학전문학교 내과학 전임강사로 재직 중 광복을 맞이해 잠시 개원하다가 1946년 미군정시절에 설립한 대구의과대학 내과로 복귀해 1948년까지 근무했다. 이후 군복무를 마치고 부교수로 복귀한 후 뜻한 바 있어 예방의학으로 전공과목을 전환해 당시 배종호 학장의 추천으로 1953년에 개설된 위생학 교실의 초대 주임교수로 취임했다. 위생학 교실은 이후 1958년에 지금의 예방의학 교실로 개칭됐다.  

당시 의학계에서는 예방의학이라는 신분야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 출발점이 쉽지 않았다. 직원이나 시설의 지원 없이 교수 한 사람만으로 강의와 실습을 도맡아야 하는 등 학생 교육만으로도 힘겨웠다. 그러나 교실 창설 이듬해인 1954년부터 조교 선생이 매년 입실함에 따라 연구 사업도 점차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1954년부터 경상북도 결핵상담소를 운영해 결핵 퇴치사업의 학술적 근거 마련에 주도적 역할을 했는데, 이는 현재 결핵협회 설립의 근간이 됐다.

1957년에는 김경수, 최동익 조교와 함께 낙동강 주변 거주 주민의 간흡충증 감염 역학 조사를 실시해 감염률이 30%에 이르고, 금호강 유역의 금호 지방이 간흡충 제1 중간숙주 서식지임을 밝혔다. 이 결과는 학계뿐만 아니라, 온 국민에게 간흡충 감염의 경각심을 일으켰고 환경위생을 바탕으로 한 기생충 질환 예방 활동에 큰 공헌을 하는 계기가 됐다.
 
1959년 간흡충역학조사
 
1958년 가창수원지 실습

1958년에는 이성관 교수가 대한위생학회 부회장에 피선되고, 그 이듬해에는 서울대에서 'BCG 효과에 미치는 제 인자'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면서 학계에서의 입지가 굳어지기 시작했다. 이성관 교수의 'BCG 접종 후 튜버큘린 알러지에 미치는 제 요소'를 필두로 경북의대 예방의학 교실에서는 항결핵제에 대한 내성균의 저항력, 결핵 역학, 기생충 역학에 관한 수많은 연구 성과물이 생산됐다. 그는 총 8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는데 ,그중 절반 이상이 결핵 및 투베르쿨린 반응과 BCG에 관한 것으로 결핵 왕국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했다.

투베르쿨린 반응에 결핵균 외의 타 항산성 균과의 교차반응으로 위반응(僞反應)이 있음을 의심해 결핵 환자의 객담에서 발견한 비정형 항산성 균이 위반응에 관여하고 있음을 증명했다. 비정형 항산성 균을 분리 동정한 것은 우리나라 최초라는 개가를 올린 일이었으며, 5세 이상의 인구 중 결핵 유병률 28.8%나 되고 회충 감염률이 약 95%임을 확인하는 등 결핵 역학이나 결핵 내성, 기생충 감염에 대한 큰 연구업적을 쌓았다.

그리고 간흡충증에 대한 피부반응 진단을 국내 최초로 확립하는 등 기생충학 연구에 특화된 최동익 교수에게 기생충센터를 운영하게 하다가 1971년에 기생충학 교실로 분과 발전시켰다. 이성관 교수팀의 이러한 연구업적은 우리나라의 망국지병이라고 할 수 있었던 결핵과 기생충의 퇴치와 예방대책 수립의 중요한 기초자료가 됐다. 
 
1961년 이성관 교수 연구팀 안동지역 결핵역학조사

1960년 11월부터는 국제원자력기구 장학생으로 독일 뷔르츠부르크 대학에서 8개월간 연수 후 이어서 일본 방사선종합의학연구소에서 6개월간 연수를 했다. 한편 1961년 9월에 이성관 교수의 학장 발령장이 문교부에서 내려왔으나 군사혁명주체세력을 배경으로 한 반대파들의 농간으로 본인에게 전달되지 않고 경북대 본부의 서류 창고로 들어가고, 1962년 겨울에는 교수의 파벌싸움에 학생들을 부추겼다는 누명을 씌워 권고사직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억울한 누명이 결국 벗겨지고 1965년에 복직됐으며 1967년에는 학장으로 임명됐다. 

1960년대에 들어서서 정부의 첫 경제개발계획에 의한 사회개발에 따라 국민의 건강 문제도 변화했다. 이에 따라 1965년부터는 직업병 예방사업으로 방향을 바꿔 산업보건 분야 개척에도 일역을 담당했다. 대한산업보건협회 경북지부를 결성하고 이성관 교수가 그 지부장(1965~1972)이 되어 근로자 건강진단사업을 시작했다. 1965년 11월부터 2년간 대한기생충학회 부회장으로 활동했으며, 1967년에는 학장 임명과 함께 대한결핵학회 부회장에 피선됐다.

1967년에는 제19차 대한예방의학회 학술대회를 경북의대 중앙강당에서 성황리에 개최했는데 이는 1947년에 예방의학 학술대회(당시 조선보건학회)가 처음 개최돼 1953년에 부산대 법대에서 학술대회(이때 대한위생학회로 개칭)가 열린 이후 최초로 지방대에서 개최된 예방의학 학술대회라는 의의가 있다. 1968년 김두희 교수가 전임강사로 충원됨에 따라 교실의 연구 분야는 결핵 및 기생충 관리 중심에서 환경보건 분야로 확대하는 한편, 강의도 공중보건 영역은 이성관 교수가, 역학 및 전염병 관리 영역은 김경수 조교수, 보건통계 및 기생충학 영역은 최동익 조교수, 환경보건 영역은 김두희 전임강사가 각각 분담하면서 어느 정도 현대적인 예방의학 교실의 구조를 갖추게 됐다. 이후 1971년에 김경수 조교수가 퇴임하고 정종학 전임강사가 발령을 받았다. 

1970년대에는 모자보건을 비롯한 지역사회의학과 인구정책으로서의 가족계획 사업에 참여했다. 이를 위해 1970년 7월부터 11월까지 미국에서 공중보건 및 가족계획 연수를 다녀왔다. 1970년에 경산군 보건소를 모자보건과 가족계획을 위한 시범보건소로 지정해줄 것을 도지사에게 건의했다. 경상북도와 협의회를 여러 차례 가진 후에 경산군의 지역사회 보건사업을 육성하기로 합의함과 동시에, 본과 4학년의 지역사회보건 실습장으로 활용하는 한편 UNICEF로부터는 학생실습을 위한 승용차를 비롯해 신간 서적과 각종 실습기구 및 시청각 기구를 원조받았다. 이 시범사업을 위해 '농촌지역의 의료필요도'를 조사했고 이 공로로 이성관 교수는 경북의사회와 대한의학협회의 학술상을 받았다.

다음 글은 1977년 한국보건개발연구원에서 발간한 '한국의 보건시범사업'에 이성관 교수가 게재한 ‘면요원 간호보조원을 주역으로 한 면단위 지역사회 보건사업’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의사가 없는 무의면을 대상으로 의료를 포함한 보건사업을 전개함에 있어서 현존 정부 의료요원을 활용하여 1차적인 간호보조원들에게 가능성을 시도한 사업이다. 즉 면에 배치된 간호보조원들에게 다목적 사업요원으로서 필요한 교육과 이들에게 간단한 의료사업을 전담시키고자 질병진료에 관한 교육과 훈련을 시킨 후 종래와는 달리 부락 단위(3~4개 부락)에 마을 주둔소를 마련해서 하루 중 오전은 자기담당마을 주민들에게 진료를 실시하고 오후에는 정부의 보건사업인 모자보건, 가족계획 및 결핵관리사업을 위한 가정방문, 예방접종, 환자관리사업 등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종래에 비하여 그 업무가 과중하기 때문에 이들 업무 중 전문직이 아니더라도 할 수 일은 일반주민에게 대행시키기 위해 부락 부인 중 유능한 사람을 각 마을마다 1명씩 선정하여 전기 간호보조원과 같이 진료를 제외한 일반보건 분야에 관해 교육을 실시해 이들이 간호보조원의 업무를 덜어주는 방향으로 사업을 진행하였다. 이 사업을 통해 진료분야에서 주민들에게 요긴한 것은 인접한 곳에 치료소가 설치되는 것이며, 복잡하고 중한 질병 외에는 진료자의 자격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는 듯하다. 특히 간호보조원들과는 접근이 쉬워서 이용률이 높았다. 또한 다목적 사업에 있어서도 담당 지역주민과 자주 접촉함으로써 친근하여져서 사업추진에 있어서 종래의 분산된 활동보다 능률적임을 확인하였으며, 부락요원들도 자기들 자신의 보건 향상을 위하여 봉사할 수 있다는 긍지를 가지고 적극 협조하여 많은 부분에서 보건요원들의 업무를 원활하게 수행할 수 있음을 확인하였다. 따라서 무의면에 있어서 1차적 의료보건사업은 간호원을 중추로 하여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하에(새마을 운동 이념으로 보건 분야에 새마을운동을 유치)추진한다면 농촌주민들에게 의료혜택과 보건향상이 이룩될 수 있을 것을 확신하였다.”
 
1974년 10월에 대한예방의학회 회장으로 취임해 1975년 10월에 제27차 학술대회를 대구 금호호텔에서 개최했다. 이성관 교수는 진작부터 학회장을 권유받은 바 있었지만, 당시 중앙집권 체제에서는 서울 소재의 대학에서 학회장을 맡는 것이 학회 발전에 더 유리할 것으로 판단해 한사코 양보하다가 이 시기에 이르러서야 학회장을 수락한 일화가 있다. 이처럼 이성관 교수가 항상 중후하고 겸허한 자세로 일관했기에 박사 문하생이자 대학 후배(1942년 졸업)인 신대식 선생은 아호를 ‘벽은’이라 지어 올렸다. 
 
1975년 대한예방의학회학술대회(대구 금호호텔)

1974년에는 이성관 교수가 지부장을 학외로 넘겨준 1972년 이후 침체하였던 대한산업보건협회 경북지부를 김두희 교수가 다시 맡아 재건했다. 지역 근로자를 위한 건강관리와 함께 장래의 예방의학 실습장으로 확보하기 위하여 대한산업보건협회와 상호 부족한 점을 돕기 위한 협정을 체결하고, 1976년에 산업보건연구실을 설치하여 특수건강진단사업을 실시하면서 지역 산업보건의 기반을 구축했다.
 
이성관 교수는 학술 활동 외에도 보사부의 기생충대책위원회 위원(1957~1960), 보사부의 결핵대책위원회위원(1960~1963), 경상북도의 경북공해방지위원회 위원(1965~1971), 보사부의 보건차관사업 자문위원회 위원(1975~1977), 경상북도 조정위원회 전염병 역학조사분과 위원(1976~1978), 군위군 새마을건강사업 지도위원(1977~?) 등의 사회 활동을 하였다. 이상과 같은 일련의 활동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1958년 3월에 경북지사의 경북문화상(학술부문), 1961년 11월에 보사부장관의 결핵공로상, 1971년 3월에 대구시장의 시민보건 향상 기여에 대한 감사장, 1972년 6월에 보사부장관의 모자보건 공로상, 1975년 3월에 경북의사회장의 학술상, 1975년 4월에 대한의학협회장의 화이자 학술상, 1976년 4월에 보사부장관의 방역사업에 대한 감사장, 1977년 2월에 경산군 어머니회의 경상군 지역사회 보건봉사에 대한 감사장을 수여했다.
 
1979년 이성관 교수와 제자들 

1980년대는 경북의대 예방의학 교실의 도약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1970년 정부에서 새마을운동을 시작하자 이성관 교수는 보건위생의 개선도 병행되어야 함을 강조하면서, 비의료인이더라도 사회활동가는 보건에 대한 지식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이에 서울대와 연세대에는 있었지만, 지방에는 전무했던 보건대학원을 설립을 통한 보건 인력 양성의 뜻을 세웠다. 당시 예방의학 교실의 김두희, 예민해 교수의 도움을 받아 각고의 노력을 한 결과 1980년 11월에 문교부로부터 경북대 보건대학원 설립 인가를 받았고 1981년 2월에 첫 신입생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이성관 교수가 초대 보건대학원 원장으로 취임했다.

이후 1982년에 강복수 조교수가 취임하고, 미국 존스홉킨스 보건대학원에서 모자보건 전공으로 박사학위 및 미국 예방의학 전문의를 취득하고 미국 월터리드 군병원에서 조교수로 있던 박정한 박사를 부교수로 영입하면서 경북의대 예방의학 교실 전성기의 서막을 열었다. 
 
1981년 경북대학교 보건대학원 개원식

이성관 교수는 1983년 2월 정년퇴임 후에 계명대학교 의과대학 예방의학 교실 주임교수로 부임하여 일흔이 되기까지 교육과 연구에 그 여력을 다 바쳤다. 그 후 잠시 산업보건 분야에서 봉사하던 중 간장 질환으로 1996년 1월에 유명을 달리하였다. 선생이 78세를 일기로 타계하자 부인과 그 유족은 그의 유업을 기리는 뜻을 담아 일금 3000만 원을 대한예방의학회에 장학금으로 기탁했으며, 예방의학 가을 학술대회에서 우수한 논문을 발표한 전공의를 대상으로 매년 ‘벽은 이성관 학술상’을 수여하고 있다.

이성관 교수는 1964년에 김정완, 김경수, 정낙진, 신대식 4인의 박사를 필두로 교직에 있는 동안 37명의 박사를 배출했다. 이성관 교수로부터 뿌리를 갖는 경북의대 예방의학 교실은 지금까지 50명 이상의 예방의학 전문의를 배출했고 그중 절반 이상이 전현직 교수로 활약하는 등 우리나라 예방의학 학문 및 보건사업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1970년 박사학위 수여식에서 제자와 함께
 
이성관 교수 근영(회갑기념논문집)

메디게이트뉴스 (news@medigat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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