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게이트뉴스] TV 뉴스를 보다가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세종충남대병원 신생아 중환자실에서 40시간 연속 근무와 365일 24시간 대기(온콜)라는 살인적인 격무에 시달리며 인터뷰를 하던 의사, 필자의 의대 동기 이병국 교수였다. 목 보호대를 댄 채 지친 기색이 역력한 그의 모습을 보며 가슴 한구석이 아려왔고,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2000년 무렵으로 기억한다. 의대 동기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슬픔에 잠긴 친구를 위해 앞장서서 부고장을 돌리고 부산 영락공원 장례식장에서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하던 청년이 바로 이병국이었다. 의대를 졸업하며 소아청소년과를 전공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그의 남다른 책임감과 따뜻함이 아픈 아이들에게 큰 힘이 될 것이라 믿었다.
26년이 지난 지금, 그는 붕괴해 가는 필수의료 최전선에서 온몸으로 날아드는 화살을 막아내고 있었다. 격무를 마친 후에도 의대 강의를 하기 위해 바쁘게 발걸음을 옮기는 그의 모습을 끝으로 뉴스는 마무리됐다. 청년 시절의 책임감 하나로 버텨온 이병국 교수마저 쓰러진다면, 세종·충남 지역의 신생아들은 도대체 누가 책임질 것인가.
그동안 소아청소년과에는 너무나 많은 비극이 지나갔다. 이대목동병원 신생아 사망 사건은 최종 무죄로 결론이 났음에도 결과가 나쁘면 의사는 언제든 감옥에 갈 수 있다는 공포를 심어주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의료 사고를 대하는 우리 사회의 사법 기준은 극도로 가혹해졌다.
과거에는 의사의 명백한 고의성을 따지던 단계를 지나, 고의가 없어도 과실 여부를 물었고, 병원에서 적절한 진료를 했는지를 추궁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제는 최선의 진료를 넘어 완벽한 결과만을 요구하는 최상의 진료 여부를 묻는다.
소아과 전문의가 밤새 당직을 서다 경련 환자를 진료했어도, 예후가 나쁘면 왜 소아 신경 전문의에게 보내지 않았느냐며 법적 책임을 묻는다. 세부 전문 분과를 깊게 전공할수록 더 높은 사법 리스크를 짊어져야 하는 모순된 상황 속에서 의사들은 제도와 법의 칼날 때문에 환자에게 선뜻 손을 뻗지 못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응급실 뺑뺑이’의 가려진 본질이다.
정부의 대책은 현장의 위기를 키우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의료분쟁 시 15억 원 배상이 되니 안심하라는 취지의 공익광고를 냈다가 거센 항의를 받고 철회한 사건이 있었다. 국가가 공식적으로 15억 원 배상액을 공인한 것이다. 이는 과도한 소송을 조장하는 꼴이 됐다. 환자를 살리려는 의사를 잠재적 범죄자로 내몬 것이다. 게다가 소아청소년과와 신생아 분야는 국가 보험금 지원 대상에서 제외됐다.
이병국 교수와 함께 근무했던 마지막 전공의는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교수님이 하시는 일은 너무너무 훌륭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와 제 가족은 도저히 그렇게 살 수 없어요.’ 뉴스 댓글 중에는 ‘자기 생명을 신생아들에게 나눠주며 버텨왔다’는 글도 있다.
지역에서 소아과 진료를 보는 의사도 마찬가지다. 보호자 없이 혼자 온 9세 아이의 진료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보호자에게 고발당해 폐업을 결정했다는 뉴스가 있다. 온라인에서는 ‘의사들이 신생아 중환자실에서 도대체 뭘 하느냐, 행위에 비해 비용이 비싸다’며 폄훼한다.
이런 적대적인 환경과 사법 위협 속에서 소아청소년과 의사들에게 사명감을 강요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현장의 젊은 의사들이 소아청소년과를 놓지 못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 아이들을 치료하는 보람 때문이다. 사선을 넘나들던 아이도 제때 치료받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몰라보게 회복해 사회로 복귀한다. 아이를 건강하게 키우도록 돕는 동네 소아과 의사는 부모들에게 육아의 가장 든든한 조력자다.
소아 의료의 붕괴를 막을 해결책은 명확하다. 의사 개인의 희생과 헌신에 기대는 비정상적인 시스템을 멈춰야 한다. 가혹한 사법 리스크를 완화하고 의사가 소신껏 진료할 수 있도록 의료사고 특례법이 제정되어야 한다. 해법은 있으나 누구도 실천하지 않는다.
26년 전 장례식장에서 친구의 슬픔을 나누며 묵묵히 땀 흘리던 내 친구 이병국이, 더 이상 외로운 영웅으로 홀로 쓰러지지 않도록 국가와 사회가 책임 있는 답을 내놓아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