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O 등 세계 연구기관도 "의사인력 지역 이동 낙수 효과 제한적, 다른 유인책 종합 모색해야"
[칼럼] 안덕선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원장·고려대 의대 명예교수
사진=챗GPT가 그려준 지방 병원 환자들이 서울 병원으로 가는 장면.
[메디게이트뉴스] 지난 2000년 초반 김대중 정권 시절에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을 비롯해 일부 사회복지학과 교수들은 "우리나라 전체 진료권역을 하나로 단일화하면 수도권의 인력자원이 물 흐르듯 지방으로 분산돼 내려가 별다른 투자 없이도 도시와 지역간의 ‘격차’를 줄일 수 있다"고 열변했다. 얼핏 그럴듯한 주장이었다. 아마도 최초의 ‘의료자원 낙수 효과’를 지어내 선전한 문구였을 것이다.
매우 긍정적으로 전파된 정부발 ‘낙수 타령’에 우리나라는 단숨에 전국이 동일한 단일 진료권이 됐다. 만약 진료권역의 단일화를 추진하지 않았다면, 현재의 수도권 쏠림 현상이 생겼을지 궁금하다. 진료권역의 개념은 의료전달체계와 함께 사회 의료보험이 갖춰야 할 기본적인 원칙인데, 이를 정부 스스로 꼼꼼한 미래 예측 없이 한방에 무너뜨린 것이다. 아울러 사회보험이 갖는 의료 소비 사회화에 대한 원칙보다는 환자의 ‘자유로운 선택’을 부여하고 마치 신천지가 열리듯 새로운 의료시장이 형성된 듯한 착시현상도 보여줬다.
단일 진료권의 효과인지는 몰라도 우리나라는 최고의 취약지 지역의 주민들도 연간 수진 횟수가 평균 29회를 초과한다. 물론, 거주지역의 관내 진료가 아닌 원정 진료의 결과로 보인다. 정부가 철저하게 통제하는 수가체계에서 안정적이고 예측이 가능한 시장이 형성돼 유지될 리 없어 보이지만, 의료의 질을 찾아 자유롭게 전국을 돌아다니는 환자 선택의 자유가 예측하지 못한 ‘낙수 효과’였다.
덕분에 수도권 집중 현상은 피할 수 없는 결과가 됐다. 이로 인해 이젠 전국구 자유 진료권과 전문의 진료가 어떤 나라도 가보지 못한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의료의 특징적인 형태로 굳어졌다. 분명 의료제도는 사회보험에 의존하고 수가 통제도 엄격한데, 이에 맞는 ‘의료시장’이 형성돼 있는 기현상을 보여준다.
환자의 수도권 집중은 재벌 기업의 의과대학 설립 이후 더욱 두드러진 현상으로 나타났다. 2000년대 초만 해도 당시 상당수의 신생 의과대학들은 자리를 잡지 못한 채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우리나라 국민의 인식은 식민지 시절부터 역사가 긴 수도권 의과대학과 6.25 전쟁 이후 북유럽인들이 설립한 국립의료원, 그리고 일부 지역의 선교재단이 설립한 병원이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의 의료를 제공하는 기관으로 인식했다.
해방 이후 혼란기에 양성된 의사로 정규 교육을 밟지 않은 다양한 경력의 의생을 시골의 ‘한지의사’로 의사 인력에 편입시킨 역사도 오늘날 수도권과 지방간의 의료 격차를 심화시킨 주요 요인으로 파악된다.
미래에 펼쳐질 의료의 큰 그림 보고 추계해야 하는데, 과녁도 없이 단순 숫자에만 몰입
이제 정부의 ‘낙수 타령 2절’은 우리나라 의사 수가 OECD 평균치 이하로 의사 수 총량 증원을 위한 홍보송으로 이어지고 있다. 의대 정원 확대로 인한 낙수 타령은 최근 의사 인력 추계위의 활동으로 다시 유행하는 듯하다.
의사 추계의 목적은 단순하게 ‘적정 의사 수’를 산출하는데 있지 않다. 추계가 지니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서로 다른 가정하에서 의사 부족 또는 과잉의 위험을 식별함으로써 올바른 정책 결정을 지원하는 데 있다. 이러한 이유로 선진국에서는 단일 추계결과보다는 다중의 모형과 다양한 시나리오를 분석하고 활용하는 게 일반적이다.
의사 추계결과는 정책 결정 그 자체와는 명확히 구분돼야 한다. 추계는 향후 발생할 수 있는 문제와 정책 간 선택의 부담이 내포돼 있다. 따라서 도출된 추계는 의대 정원과 수련체계, 근무 조건에 대한 최종 결정 과정에서 사회적 가치와 재정 여건, 그리고 신중한 정치적 판단을 포함하는 ‘별도의 과정’으로 충분한 숙의를 통해 정해야 한다. 의사 총량에 대한 추계 그 자체만으로 최종 정책 효과를 결론짓는 것이 아니라, 이와 관련된 모든 세부적인 사안들을 묶어 하나의 통합적이고 융합적인 ‘정책 패키지’를 함께 설계해야 한다.
그 이유는 추계만으로는 의료제도의 구조와 근무 환경, 행태 변화 등을 포괄해 반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진국에서는 추계 하나 자체로 정책 결정을 대체하지 않는다. 현재의 우리나라 추계위는 적정 정원 수 찾기 또는 ‘정답’ 맞추기에 몰입한 듯한 인상을 준다.
본래 의사 추계를 시작하려면, 우선 추계의 명확한 목표 설정을 해야 한다. 추계의 시작은 의료가 당면한 전반적인 문제와 현실 상황에서 출발해야 하는데, 속칭 ‘응급실 뺑뺑이’와 소아청소년과 ‘오픈 런’이라는 일부 자극적이고 눈에 띄는 의사 접근성에 대한 문제를 부각하여 추계의 목표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배출된 소아과 전문의 수로 보면 이미 선진국 수준이다. 응급실 뺑뺑이 문제도 응급 의료전달체계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의사 인력의 부족인지 그 선이 명확지 않다.
낙수 타령에도 불구하고 지역의 의사 부족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유는 이미 국제적으로 잘 드러나 알려져 있다. OECD 보고서에는 “의사 분포의 불균형(대도시 집중)은 대부분 국가에서 지속되며, 단순히 의사 수를 늘리는 것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라고 알려준다. OECD Health Working Paper에 따르면, 의사의 지리적 불균형에 대해 “의사는 거의 모든 OECD 국가에서 지역적으로 불균등하게 분포하며, 다양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불균형은 지속된다”라고 강조하고, “의사의 밀도를 논하는 ‘의사 총량’은 지역 불균형 문제와 별개로 취급해야 한다”라고 권고한다.
세계보건기구(WHO) 역시 농어촌 및 오지의 의사 인력 문제를 다루면서, 이에 대한 해법은 “교육(선발과 훈련)을 비롯한 적절한 규제와 재정 문제, 그리고 근무 환경 등 다양하고 현실적인 유인책을 지원하는 일종의 종합선물 세트와 같은 ‘묶음 패키지’여야 하며, 단순한 공급 확대만으로는 그 필요충분조건이 아니다“라고 전문가의 견해로 강조한다.
WHO 등 세계 유수 연구기관 의사 인력 낙수 효과는 제한적, 다른 유인책 종합 모색해야
미국의 1차 의료 인력 변화를 분석한 ‘JAMA Network Open’ 연구를 보면 전체적으로 1차 의료 분야는 의사와 전문간호사, 그리고 PA 등을 이용해 전체 인력의 밀도는 증가했지만, 그 증가 폭은 도시가 훨씬 더 커서 결과적으로 도시와 농촌 간의 격차는 더 벌어졌다고 보고했다. 또 다른 JAMA 연구(안전망과 취약지 배치 프로그램 관련)에서는 특정 프로그램의 인력은 시간이 지나면서 시골의 비중이 감소하는 양상이 관찰된다고 분석했다.
이는 의사의 총량이나 지역 프로그램을 늘려 편성해도, 시장과 생활, 경력 등 여러 복잡한 요인에 의해 인력이 도시로 더 빠르고 강하게 흡수되는 패턴을 보여 ‘의사 인력의 낙수 효과’는 그야말로 매우 제한적이라는 사실이 증명됐다고 설명한다.
캐나다는 국가 단위로 의사의 공급·분포·이동을 체계적으로 통계화하는데, 지역과 원격지의 분포 차이를 별도로 고려해야 함을 명시하고 있다. 또한 의사의 출신과 수련 위치 등 현재의 교육정책이 향후 ‘지역의 근무’와 연관된다는 연구를 기반으로 향후 어떤 의사를 뽑고, 어디에서 수련할 것 인가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즉, 단순한 의사 총량만으로는 의사 분포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함의가 내포돼 있다. 불균형이나 지역의 문제는 총량보다는 배치를 위한 유인책으로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한데, 이는 의과대학의 증원 정책을 넘어 전공의 정원, 수련체계, 전달체계와 모두 연동돼 영향을 준다는 의미다.
현재와 같은 불완전 미완성의 추계결과를 두고 정부는 앞으로 5년 주기로 재추계를 한다는데 5년이 아닌 수정 추계 주기를 2~3년 내로 줄여 오류가 포착되면 즉시 수정하도록 해야 한다. 최근 추계에 대한 잡음이 많아지자, 추계위는 주어진 여건에서 열심히 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5개월간에 서둘러 급조된 위원회는 정상적인 추계를 할 역량이나 시간적 여유, 그리고 위원회 구조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이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추계로 늘어난 정원은 ‘지역의료’로 배당할 것이라는 복지부의 발표도 애초에 추계가 지역의료 인력배치를 위한 것이었는지도 여전히 추계 목표 설정에 커다란 혼란을 보여준다. 이는 추계의 정책적 목표를 명시적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것인데, 지역을 위한 인력이 과연 ‘시장 수요’인지, ‘필수 의료 보장’인지도 구분하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지역과 필수 의료 부족 문제를 의사의 총량 문제로 환원시키는 오류와 과학적인 추계로 반드시 갖춰야 할 FTE 개념의 미적용 문제는 현 상황에서 추계의 정당성을 회복하기에는 너무나도 거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