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형사특례 폐지하고 수사 진입 전 걸러야”…21개 의학회, 의료사고 ‘5법 패키지’ 제안
21개 학회 법제이사 모임, 국회 찾아 법안 설명…조정 자동개시·12대 중과실 삭제하고 수사 전 전문검토 도입
'결과 발생=과실' 후향적 판단 차단…실제 분쟁·범죄혐의 사건만 조정·수사, 무과실·불가항력 피해는 국가 회복지원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메디게이트뉴스 박민식 기자] 내과∙외과∙소아청소년과∙산부인과∙심장혈관흉부외과 등 21개 학회 법제이사들이 의료사고가 곧바로 의료분쟁과 형사절차로 이어지는 구조를 손질하기 위해 환자기본법∙의료분쟁조정법∙형법∙형사소송법∙의료법 등 ‘5법 패키지’ 개정안을 마련했다.
내년부터 시행 예정인 의료분쟁조정법의 형사특례와 고위험 필수의료 및 사망∙중증 의료사고 자동개시, 12대 중대한 과실 규정을 폐지하는 대신 의료사고 초기 독립적인 사실확인과 전문검토를 거쳐 실제 책임을 다툴 필요가 있는 사건만 조정∙수사절차로 넘기자는 게 핵심이다. 불가항력 의료사고는 국가가 피해 회복을 지원하도록 했다.
2일 의료계에 따르면 21개 학회 법제이사 모임은 최근 의료분쟁조정법 개정안을 발의했던 일부 의원들을 찾아가 이 같은 내용의 법률 패키지 개정안을 제안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들은 조만간 대한의사협회(의협) 측에도 관련 논의를 요청할 계획인 것으로 전해졌다.
해당 학회 법제이사들은 개정된 의료분쟁조정법이 예정대로 내년에 시행될 경우 현장의 혼란을 더욱 키울 수 있다고 보고, 단체대화방 등에서 대응 방안을 논의한 끝에 5개 법률에 대한 개정안 초안을 마련했다. 향후 추가 논의를 거쳐 최종안을 완성할 계획이다.
환자기본법·의료분쟁조정법·형법·형사소송법·의료법 동시 개정 제안
5개 패키지 법안의 핵심은 사망∙중증 등의 결과가 발생했다는 이유만으로 자동으로 조정∙감정∙형사절차가 진행되지 않도록 하는 데 있다. 학회 측은 의료사고가 발생하면 먼저 독립적인 사실확인과 전문검토를 거치고, 불가항력 사고는 피해 회복 지원으로, 실제 분쟁이나 범죄혐의가 있는 사건은 조정∙수사절차로 각각 분리하는 구조를 제안했다.
법안별로 살펴보면 환자기본법 개정안의 경우 의료사고 발생 시 환자가 병원 측 설명을 듣고도 의문이 남으면 의료분쟁조정중재원이나 수사기관으로 가기 전에 중앙환자안전센터를 통해 독립적인 사실확인과 의학적 설명을 받을 수 있게 하는 내용이 담겼다.
센터는 환자 측의 요청 접수와 자료 확보, 외부 전문검토 의뢰, 절차관리 등을 맡으며 실제 전문적인 의학적 검토는 해당 분야의 임상의사가 수행하도록 했다. 인공지능(AI)은 진료기록의 시간순 구조화와 자료 누락 확인, 환자 주장과 객관적 기록 대조, 설명자료 초안 작성 등에 보조적으로 활용하되 과실이나 법적 책임을 판단하지 못하도록 했다.
의료분쟁조정법 개정안에는 오히려 형사특례와 12대 중대한 과실 조항을 삭제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2027년 시행 예정인 법에 담긴 반의사불벌, 형 감면, 공소제한 등 형사특례를 삭제하는 대신 형법∙형사소송법을 별도로 개정해 불필요한 사건이 본격적인 형사절차에 진입하는 단계부터 걸러내겠다는 것이다. 학회 법제이사들은 현재 조건부 형사특례가 설명∙배상 등을 둘러싼 합의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는 만큼, 형사절차 진입 단계에서 전문검토를 거치고 형법상 과실∙인과관계 판단 기준을 명확히 하는 편이 낫다고 봤다.
또 사망∙중증 사고를 포함해 의료기관이 명시적으로 동의한 경우에만 조정을 개시하도록 했으며, 의료사건이 발생했다는 사실만으로 의료행위와 결과 사이의 인과관계나 의료진의 과실∙법적 책임을 추정하지 않는다는 ‘책임중립’ 원칙도 명시했다. 의학적 판단에는 해당 사건과 동일하거나 직접 관련된 전문분야의 의료인 2명 이상이 우선 참여하도록 했다.
당시 의학 수준에서 합리적으로 회피하기 어려운 위험이 현실화돼 중대한 피해가 발생한 의료사건에 대해서는 과실 여부와 별개로 국가가 회복지원금을 지급할 수 있도록 했다. 아울러 현재 중재원의 업무성과 평가가 조정 개시∙성립 등 성과 중심으로 이뤄져 무리한 조정을 부추길 수 있다고 보고, 환자와 의료인의 절차 만족도와 공정성∙중립성, 처리기간, 감정의 전문성, 반복∙장기 분쟁 감소, 국가회복지원의 신속성 등을 중심으로 평가하도록 하는 내용도 개정안에 담았다.
자료=21개 학회 법제이사 모임. 재가공=챗GPT, 메디게이트뉴스
형사소송법 개정안은 의료사고가 발생했다는 이유만으로 바로 의사를 피의자로 소환해 조사하는 구조를 바꾸는 데 방점을 찍었다.
의료행위로 사망∙상해가 발생해 업무상과실치사상죄가 문제되는 경우 특정 의료인을 피의자로 소환하거나 압수수색 등 강제처분을 하기 전, 또는 경찰이 송치 여부를 결정하기 전에 해당 분야 전문의 2명 이상의 전문검토를 거치도록 했다. 전문검토에서는 결과가 원질환∙기저상태자연경과나 알려진 합병증으로 설명될 가능성, 문제된 의료행위와 결과 사이의 의학적 관련성, 당시 현실적으로 실행 가능한 결과 회피조치가 있었는지, 실제 선택이 합리적인 전문적 판단이나 재량 범위를 벗어났는지 등을 살피도록 했다.
전문검토 결과 범죄혐의의 의학적 전제를 뒷받침할 객관적 근거가 부족한 경우에는 원칙적으로 피의자 소환이나 강제처분, 송치를 하지 못하도록 했다. 다만 새로운 객관적 증거가 있거나 전문검토 결과와 달리 수사를 진행할 구체적이고 합리적인 사유가 있는 경우에는 그 이유를 서면으로 기록하고 수사를 진행할 수 있게 했다. 살인∙상해∙성폭력 등 고의범죄나 증거인멸 우려 등 긴급한 경우에는 예외를 뒀다.
형법 개정안은 ‘나쁜 결과’가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과실이라고 판단하는 후향적 접근을 막는 데 주안점을 뒀다.
의료∙구조∙구급∙소방 등 이미 존재하는 생명∙신체 위험을 감소시키는 업무를 ‘위험감소업무’로 정의하고, 이런 업무에 업무상과실치사상죄를 적용할 때는 당시 이용 가능했던 정보, 판단시간, 대상자의 기존 위험, 긴급성, 자원을 종합적으로 판단하도록 했다.
또 사망이나 상해 등의 결과가 발생했다는 사실, 사후적으로 더 나은 방법이 있었다는 사실, 실제 선택한 방법 외에 다른 합리적 선택지가 있었다는 사실, 기존 위험을 완전히 막지 못했다는 사실을 완전히 막지 못했다는 사실만으로 업무상 과실이나 인과관계를 인정하지 못하게 했다. 설명이나 기록상 미비가 있더라도 그 미비와 사망∙상해 결과 사이의 구체적 관련성이 입증되지 않으면 이를 그 자체로 업무상과실치사상의 과실이나 인과관계 근거로 삼지 못하도록 했다.
"책임 없는 사건 빨리 끝내자는 것"…환자도 독립적 설명과 국가 보상으로 도움
끝으로 의료법 개정안은 의료와 무관한 범죄로 금고 이상의 형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일률적으로 면허를 취소하게 한 현행 구조를 손질하는 내용이다.
일반범죄에 대한 형사처벌은 의료인도 일반 국민과 동일하게 받되, 면허규제는 의료직무와 환자안전에 실제 관련이 있는지를 기준으로 판단하자는 취지다. 일반범죄 금고형에 따른 포괄적 결격사유를 삭제하고, 의료인의 지위나 진료관계를 직접 이용해 환자∙보호자를 대상으로 살인∙성폭력 범죄를 저지른 경우 등으로 필요적 면허취소 범위를 좁혔다.
반복적인 전문역량 결함이나 객관적인 진료불능 등이 확인된 경우에는 곧바로 면허를 취소하는 대신 교육∙재교육, 멘토링∙감독하 진료, 업무범위 제한, 자격정지 등의 단계적 조치를 거치도록 했다. 또 민원∙의료분쟁∙고소∙사망·합병증 건수 자체를 면허적격성 심사의 근거로 삼지 못하도록 하고, 진료량∙환자 중증도∙응급성∙고위험 진료 비율 등을 보정하도록 했다.
21개 학회 법제이사들은 “내년 시행 예정인 의료분쟁조정법의 경우 12대 중대한 과실 목록이 후향적 체크리스트로 작동할 위험이 있다”며 “형사특례를 받기 위한 설명, 배상 요건도 사실상 합의 압력으로 체감될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했다.
이어 “5법 패키지의 출발점은 ‘의료인을 처벌하지 말자’가 아니다”라며 “환자에게는 설명을 먼저, 분쟁에는 조정을 정확히, 불가항력 피해에는 회복을, 형사사건에는 전문 검토를, 반복되는 실제 위험에는 교정을 먼저 적용하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이들은 “필수의료를 살리는 가장 중요한 변화는 ‘책임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책임이 없는 사건을 빨리 끝내는 것’”이라며 “5개 법안 패키지는 환자는 더 빨리 설명과 회복지원을 받고, 의료진은 불필요한 다중절차에서 벗어나며 명백한 과실∙범죄는 더 정확하게 책임을 묻는 구조”라고 했다.
이어 “개정된 의료분쟁조정법이 시행되기 전에 의료분쟁조정법 핵심조항을 재검토하고 5개 법안 패키지에 대한 논의에 착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