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종=아시아경제 권해영 기자] 국내 주력산업인 자동차 업계가 정부의 '과속' 탄소중립 정책 추진으로 제조업 경쟁력 상실 위기에 내몰릴 수 있다는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환경부가 2030년까지 하이브리드차 비중 축소를 주장하는 데다, 국가 탄소중립 정책의 범부처 컨트롤타워인 탄소중립위원회 역시 2050년 전기차·수소차 100% 보급 목소리를 내는 환경부 입장에 힘을 싣는 내부 의견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글로벌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탄소중립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2030년과 2050년 탄소중립 정책을 수립할 탄소중립위가 제조업 경쟁력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탄소중립 정책의 속도를 조절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고개를 들고 있다.
◆14년 후 내연기관차 퇴출 우려…과속 탄소중립시 생태계 붕괴=자동차 업계가 우려하는 것은 탄소중립위 등이 2050년 '이퓨얼(electricity-fuel)'과 같은 탄소중립 연료를 쓴 내연기관차를 탄소감축 수단으로 인정하지 않을 경우 내연기관차 생태계가 급격히 붕괴될 수 있다는 점이다.
국내 내연기관 전속 부품기업 수는 2019년 기준 2815개사다. 자동차연구원은 전기차·수소차 비중이 2030년 정부 보급 목표인 33% 수준으로 확대될 경우, 내연기관 전속 부품기업 수는 1915개사로 900개사 감소할 것으로 예상했다. 고용은 같은 기간 3만5000명 줄어들 것으로 내다봤다.
차 업계 관계자는 "국내 제조업 부문에서 자동차 부품산업은 고용의 6.2%, 생산의 6.5%, 수출의 3.6%를 차지한다"며 "내연기관차를 조기 퇴출할 경우 국내 자동차 부품업계는 사업재편에 나설 시간 조차 없이 급속히 붕괴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우려했다.
상황이 이런데도 탄소중립위 내부에선 전기·수소차 보급 속도를 가속화 해야 한다는 환경부 주장에 힘을 싣는 의견이 적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환경부는 2030년 하이브리드 비중 축소를 주장하고 있다. 정부가 지난 2월 국무회의를 통해 2030년 전기차 300만대, 수소차 85만대, 하이브리드 400만대 보급 목표를 세웠는데 환경부가 이후 2030년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 상향 예정을 이유로 순수 전기차·수소차 비중 확대를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환경부 측에 무게를 실었던 탄소중립위가 산업부, 자동차 업계 등의 요구를 수용해 2050년 친환경 연료를 쓴 내연기관차를 탄소감축 수단으로 인정할 지도 향후 관건이다.
◆"이퓨얼, 미래차 전환 징검다리"…獨·日도 연구개발=자동차 업계는 이퓨얼 등 친환경 연료 기술개발을 통해 내연기관차 생태계가 2050년 탄소중립에 대응하고 사업재편에 나설 수 있는 시간을 줘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이퓨얼은 아직 개발 초기 단계로 실현 가능성, 경제성 등에 의문이 있지만 기술 구현과 확장 가능성을 열어놓고 내연기관차의 탄소중립 이행 연착륙을 유도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정부 관계자는 "전기차·수소차 보급이 예상보다 빨리 이뤄질 수도 있고, 내연기관차가 당분간 시장을 지킬 수도 있다"며 "이퓨얼을 탄소감축 수단으로 인정하면 연구개발(R&D) 투자 확대, 설비 규모 대형화, 경제성 확보, 내연기관차 사용 등의 선순환이 이뤄질 수 있는 만큼 시장을 예단하지 말고 가능성을 열어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통적인 내연기관차 강국인 독일, 일본 정부도 앞다퉈 이퓨얼 연구개발을 지원하고 있다. 독일은 연방환경부(BMU)가 2019년 이퓨얼 생산을 위한 에너지원 간 전환(P2X) 실행계획 발표했다. 일본 정부도 2020년 탄소중립 수단으로 이퓨얼을 개발, 2050년 이퓨얼 가격을 가솔린 가격 이하로 실현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독일 아우디, 일본 도요타·닛산·혼다 등 완성차 업체도 이퓨얼 연구에 착수했다.
업계에선 탄소중립위가 향후 탄소중립 로드맵 수립 과정에서 이 같은 산업계 현실을 고려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탄소중립위는 오는 10월말 2030년 NDC 상향치 수립(현행은 2017년 대비 24.4% 감축)을 비롯해 2050년 탄소중립 로드맵을 발표할 예정이다. 특히 친환경 시민단체, 학계 인사가 대거 포함된 반면 산업계 인사는 배제됐다는 지적이 높은 만큼 탄소중립위가 지금부터라도 산업계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지적이다.
재계 관계자는 "탄소중립이란 큰 방향엔 공감한다"면서도 "이행 과정에서 산업계의 고통이 수반되는 만큼 탄소중립 속도조절과 산업계에 대한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권해영 기자 roguehy@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