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경제 김은별 기자, 장세희 기자] 한국은행 용역보고서에서 '물가·금융안정 외에 고용상황까지 고려해 기준금리를 결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분석이 나왔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세계적으로 '적극적으로 돈을 푸는 중앙은행'이 유행이 됐고,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까지 고용을 통화정책 우선순위로 삼으면서 한은이 운용목적에 ‘고용안정’을 추가할지가 관심을 모았지만 연구용역에선 '효과는 없고 부작용만 클 수 있다'고 했다. 특히 보고서에는 우리나라 고용의 경직성이 커 통화정책으로 다루기가 어렵다는 내용도 담겨 눈길을 끌었다.
30일 아시아경제신문이 국회로부터 입수한 '한은 설립목적에 고용안정 추가 방안에 대한 종합검토' 용역보고서에 따르면, 경제학 교수 4명은 "고용목표를 중앙은행 책무에 넣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통화정책은 고용에 영향을 미치기 어렵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냈다. 이번 연구에는 김진일·신관호(이상 고려대), 장용성(서울대), 하준경(한양대) 경제학과 교수 등이 참여했다. 한은 공식견해는 아니라고 밝혔지만, 용역연구인 만큼 앞으로도 한은법을 바꾸자는 주장이 나올 때마다 근거로 삼을 수 있게 됐다.
연구진은 한은에 고용 책무를 지울 경우 나타날 수 있는 문제점으로 ▲인플레이션·자산시장 급등과 금융시스템 불안정 ▲우리나라의 경직된 노동시장으로 효과 미미 ▲중앙은행 독립성 훼손 ▲정책적 수단 부족 등을 꼽았다. 한은을 제외한 37개국을 분석한 결과 고용안정을 책무에 추가한 나라는 10개였다. 중앙은행법에 '고용안정'을 목표로 넣은 국가들에선 실제로 실업률이 낮아지는 효과는 미미했지만, 물가가 뛰고 가계부채가 커지는 경향이 나타났다.

인플레이션, 자산급등 초래 가능성전문가들은 무엇보다 고용안정을 한은의 책무에 추가할 경우 ‘인플레이션’이 우려된다고 이구동성으로 지적했다. 부진에 빠진 고용시장을 고려해 돈을 계속 풀면 인플레가 올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예를 들어 실업률은 낮은데 집값은 높은 상황에서 고용에 초점을 둬 돈을 풀면 집값이 더 오를 수밖에 없다.
장용성 교수는 "앞으로도 인플레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하기 어렵다"며 "물가와 실업률간 관계가 줄고 심지어 역전됐던 현상(필립스곡선 평탄화)도 다시 변할 수 있고, 공급 측면에서 충격이 발생하면 물가·실업률을 둘다 놓칠 수 있다"고 말했다.
작년초 연 1.25%였던 기준금리가 0.50%까지 떨어진 가운데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5월 2.6%까지 뛰었다. 연간 물가상승률도 2%내외에서 움직일 것으로 보인다. 고용시장을 살리려다 부동산이나 주가 거품만 만들 수 있다는 점도 위험 요소다. 보고서에 따르면 고용안정을 목표로 추가한 호주·캐나다·뉴질랜드·노르웨이 등에서 가계부채가 급등했다. 한국은 이미 가계부채가 국내총생산(GDP)의 100%를 넘은 상태다.

한국 고용유연성, 미국의 절반…통화정책이 효과 미칠지 의문한국의 고용시장 규조가 유연하지 않다는 점도 문제로 꼽혔다. 연구에 따르면 GDP대비 고용률 변동성은 한국(0.38)이 미국(0.73)의 절반 수준이었다. 같은 크기의 불황이 와도 우리나라 노동시장의 변화는 미국의 절반 수준에 그친다는 뜻이다. 주요국 고용유연성지수를 비교해도 한국(46.2)은 미국(92.4)의 절반 수준이었다.
장 교수는 "한국경제에서 생산과 고용간 동조성이 매우 낮다"며 "고용이 총수요 정책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로봇·온라인 쇼핑 발달로 산업구조가 바뀌어 고용과 생산 간 연결고리가 약화됐다면, 더더욱 중앙은행이 낄 틈은 없다는 것이다.
한은 독립성 침해…수단도 없다한은법에 여러 목표가 추가될수록 한은의 독립성이 침해될 가능성도 커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치적인 이유에 따라 한은에 계속해서 돈을 풀어야 한다는 압박이 올 수 있다는 것이다. 한은에 최소한의 금융안정 수단을 줘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예를 들어 실업률은 낮은데 집값은 높은 상황에서 고용에 초점을 둬 돈을 풀면 집값이 더 오를 수밖에 없는데, 한은이 이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대출규제를 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하준경 한양대 교수는 "한은의 고용안정조사·예측기능을 강화해야 하고, 최소한의 금융안정 수단을 확보하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거시건전성 정책, 특히 주택담보대출비율(LTV), 총부채상환비율(DTI) 상한설정권, 원리금상환비율(DSR)·유동성커버리지비율(LCR) 설정권, 감독·검사권 등을 한은에 줘야 효율적으로 통화정책을 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 교수는 "노르웨이나 뉴질랜드 등은 중앙은행과 정부가 양해각서(MOU)를 체결해 중앙은행이 주요 비율을 결정하는 식으로 정책을 운용한다"고 전했다.
고용, 민간·정부가 '규제 혁신'으로 해결해야전문가들은 중앙은행에 고용에 대한 부담을 지우는 대신, 민간에서 새로운 일자리가 창출되는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져야 고용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추가 일자리는 규제를 합리적으로 개선해 새로운 산업영역에서 만들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한은의 정책수단도 없는 상황에서 고용목적만 추가하면 (정치적으로 해석되며)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훼손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정부가 재정을 풀어 일자리를 만드는 것보다 민간이 알아서 일자리를 만들 수 있도록 규제를 풀어줘야 한다는 조언도 나온다. 한정된 재원으로 일자리를 만드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재정일자리 확충에 힘쓰고 있지만, 전체 산업 취업유발계수는 여전히 제자리 걸음이다. 2019년 산업연관표를 보면 취업유발계수(2019년)는 10.1명으로, 2018년과 같았다. 취업유발계수는 상품에 대한 소비·투자·수출 등 최종수요가 10억원이 발생하면 전산업에서 직·간접적으로 유발되는 취업자수를 의미한다. 2015년 11.4명에서 2017년 10.6명, 2018년 10.1명 등으로 계속해서 떨어졌다. 박영범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재정을 직접 투입해 일자리를 만들기보다는 규제완화와 노동비용 감소 등의 노력을 지속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정부는 하반기에도 추가 재정투입을 통해 15만개 일자리를 창출할 계획이다.
김은별 기자 silverstar@asiae.co.kr
장세희 기자 jangsay@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