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게이트뉴스] 2025년 11월, 여의도 국회의 시계가 다시금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국회 보건복지위 법안소위가 ‘지역의사제’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반면, 전북 남원이 사활을 걸었던 ‘공공의대(공공의료사관학교) 설립 법안’은 일단 숨 고르기에 들어갔습니다.
표면적으로 보면 의사 회원 여러분께는 '공공의대 신설은 막았으니 그나마 다행 아니냐'고 안도하실지 모릅니다. 하지만 법제이사로서 저는 지금 상황이 2020년보다 훨씬 더 교묘하고 위험한 국면으로 접어들었다고 판단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입법 지연’이 아닙니다. 더불어민주당이 설계한 ‘단계적 포위 전략’이 작동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1. 학습효과: 전선을 분리하라 (Divide and Conquer)
2020년, 정부여당은 의대 증원과 공공의대 설립을 한꺼번에 밀어붙이다 전공의 파업과 의대생 국시 거부라는 거대한 저항에 직면했습니다. 그들은 그때의 실패에서 철저히 학습했습니다.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으려다 다 놓친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나온 전략이 ‘선(先) 지역의사제, 후(後) 공공의대’입니다.
왜 지역의사제가 먼저일까요? ‘새로운 학교’를 짓는 공공의대 설립은 공정성 시비와 특혜 논란, 그리고 부실 교육 우려라는 약점이 있어 의료계가 반대할 명분이 뚜렷합니다.
하지만 지역의사제는 '기존 의대 정원을 활용해 시골에 의사를 보내자'는 논리이기 때문에 국민 여론은 물론 여당인 국민의힘 의원들(특히 농어촌 지역구)조차 반대하기 어렵습니다. 즉, 의료계의 반대 논리가 먹혀들기 힘든 ‘약한 고리’를 먼저 타격한 것입니다.
2. 이름만 장학금, 실체는 ‘면허 박탈’의 족쇄
이번에 소위를 통과한 지역의사제 법안의 디테일을 보셨습니까? 과거의 엉성했던 ‘공중보건장학제도’가 아닙니다.
핵심은 ‘강제성’입니다. 장학금을 받고 입학한 학생은 졸업 후 10년간 지정된 지역에서 근무해야 합니다. 만약 이를 어기면 단순히 받은 돈을 토해내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의사 면허 취소’라는 초강수를 두었습니다.
군 복무 기간이나 서울 대형병원에서의 수련 기간은 10년 의무 기간에 포함되지도 않습니다. 이는 헌법상 직업 선택의 자유를 침해하는 위헌적 요소가 다분하지만, 정치권은 이를 ‘계약에 의한 의무 이행’으로 포장하며 법적 방어막을 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한번 발을 들이면 면허를 걸지 않고서는 빠져나갈 수 없는 시스템을 만든 것입니다.
3. 공공의대, 포기가 아니라 ‘순서’만 바뀐 것
가장 경계해야 할 지점은 이것입니다. 지역의사제가 통과되어 ‘의사의 거주지를 법으로 강제할 수 있다’는 선례가 생기면, 그다음 수순은 필연적으로 ‘공공의료사관학교(공공의대)’입니다.
민주당 조원준 수석전문위원은 공공의대를 ‘사관학교’로 명명하며, 졸업생을 ‘의무 장교’와 같은 공공재로 규정하려 합니다.
지역의사제를 통해 민간 의대 내에 ‘지역 트랙’을 안착시킨 뒤, 2027년 대선 국면 즈음에는 '국가 방역과 공공의료를 전담할 정예 요원이 필요하다'며 공공의대 카드를 다시 꺼낼 것입니다.
그때는 이미 지역의사제로 인해 ‘강제 복무’에 대한 심리적, 법적 저항선이 무너진 상태일 가능성이 큽니다.
4. 인프라 없는 강제 배분, 결국 ‘2류 의사’ 양산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역 의료 붕괴의 본질이 단순히 의사가 그 지역에 ‘감금’돼있지 않아서입니까? 아닙니다.
정주 여건, 자녀 교육, 문화 인프라, 그리고 소신 진료를 할 수 있는 의료 환경이 전무하기 때문입니다. 댐을 막아 물(의사)을 가두려 해도, 댐 안의 땅(지역 의료환경)이 척박하면 물은 썩거나 증발해 버립니다.
10년 동안 면허를 볼모로 잡아둔다고 해서 그들이 진정한 지역 의료의 파수꾼이 될까요? 오히려 동료 의사와 환자들에게 '성적이 모자라 지역 전형으로 들어온 의사'라는 낙인(Stigma)만 찍힌 채, 의무 기간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잠재적 탈출자’들만 양산할 것입니다.
결론: 프레임 전쟁에서 밀리지 말아야
지금 국회에서 벌어지는 일은 단순한 법안 심사가 아닙니다. '의료를 시장 논리가 아닌, 국가 통제 하의 공공재로 완전히 재편하겠다'는 거대한 설계도 위에서 벌어지는 단계적 작전입니다.
남원 공공의대 법안이 잠시 멈췄다고 해서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지역의사제’라는 트로이의 목마가 성문 안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법안이 가진 위헌성과 실효성 없음을 국민들에게 끈질기게 설득해야 합니다. 의사 숫자를 강제로 배분하는 것이 아니라, 의사가 자발적으로 지역에 남고 싶게 만드는 환경을 만드는 것, 그것이 유일한 해법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은 안도할 때가 아니라, 더 정교해진 정치권의 칼날을 직시하고 단일대오로 맞서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