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경제 서소정 기자] 이창용 한국은행 신임 총재가 21일 오전 청와대에서 임명장을 받고 4년 공식 임기를 시작했다.
‘8년 만의 외부 수혈’ 인사로 한은 안팎의 큰 변화를 예고한 가운데 금융시장은 이 총재의 일거수일투족에 반응하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간 전쟁이 장기화되고 전 세계가 극심한 인플레이션에 시름하며 해법찾기에 골몰하는 시기에 통화정책 수장에 올랐기 때문이다.
대내외 불확실성이 여느 때보다 높은 시기, 이 총재가 고물가·저성장 갈림길에 놓인 한국 경제 상황 속에서 통화정책 묘수를 펼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청문회 기간 ‘인플레이션 파이터’를 자처한 이 총재가 한국의 ‘폴 볼커’의 길을 걸을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21일 만에 막내린 총재 공백= 이 총재는 이날 임명장을 받은 후 오후 3시 국회 인사청문회 태스크포스(TF) 사무실로 사용한 서울 중구 부영태평빌딩 1층 컨벤션홀에서 취임식을 갖고 본격적으로 업무를 시작한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는 전날 이 총재의 청문보고서를 여야 만장일치로 채택했으며, 이날 오전 11시 문재인 대통령은 임명장을 수여했다. 이에 따라 사상 초유의 한은 총재 공백 사태도 21여일 만에 막을 내리게 됐다.
이 총재가 대통령 임명 절차를 거쳐 취임했지만 축하 인사와 동시에 그의 앞에 쏟아지는 현안 과제들은 통화정책 수장의 어깨를 무겁게 하고 있다.
최우선 과제는 역시 물가다. 우크라이나 사태 등으로 국제유가가 급등하면서 3월 소비자물가지수는 작년 같은 달보다 4.1%나 급등했다. 4%대 상승률은 2011년 12월(4.2%) 이후 10년3개월 만에 처음이다. 문제는 이 같은 상승세가 지속될 것이란 점이다. 이 총재는 인사청문회에서 "적어도 1~2년 정도 상승 국면으로 갈 것으로 본다"고 우려했다.
그가 한국의 ‘폴 볼커’가 될 것이란 관측이 나오는 것도 그래서다. ‘인플레이션 파이터’로 잘 알려진 폴 볼커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은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에 1981년 21.5%까지 금리를 인상시켰다. 급속한 인상에 국민들의 심한 반발에 부딪혔지만 이 같은 정책으로 인플레이션은 1980년 역대 최고치인 14.8%에서 1983년 2.36%까지 내려올 수 있었다.
"인기는 없더라도 기준금리 인상으로 시그널을 줘서 물가가 더 크게 오르지 않도록 전념하겠다"는 이 총재의 발언은 인플레 파이터로서의 의지가 묻어나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는 "지금 물가 상승의 많은 부분은 유가, 공급망, 곡물가 등 공급 측면 때문이다. 따라서 금리를 올렸는데 왜 물가가 안 잡히냐는 질문이 나올 수 있지만, 이렇게 금리로 반응하지 않으면 물가가 더 빠르게 올라갈 위험이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향후 균형적인 관점에서 통화정책을 수행할 것임을 시사했다. 4월 금융통화위원회가 물가에 주안점을 두고 0.25%포인트 금리 인상에 나섰다면 향후 5월과 오는 7월 금통위에서는 성장과 물가를 균형적으로 바라보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것이다.

◆물가·가계부채 과제 산적= 약 1900조원에 달하는 가계부채도 그가 풀어야 할 난제다. 청문회에서 이 총재는 "가계부채 문제는 부동산과도 관련돼 있어 금리로 시그널을 주는 건 중요하지만 한은의 금리정책만으로는 불가능하다"며 "따라서 범정부 TF를 만들어 구조·재정·취약계층 문제 등을 고려해 종합적 해법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또 "만약 지금 막지 못하고 가계부채가 계속 증가하면, 나중에 더 큰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며 "기본적으로는 금리가 올라가면, 고통스럽지만 시차를 두고 가계부채 상승률은 꺾일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다만 이 총재는 통화정책 정상화 과정에서 불거질 수 있는 정부정책과의 충돌 가능성에 대해서는 소통과 조율을 언급, ‘일방통행’하지 않겠다는 의지도 표명했다.
정부의 추가경정예산(추경)이 물가를 자극할 수 있다는 우려에 대해서는 "지금 추경은 소상공인·자영업자를 지원하는 미시적 정책이기 때문에 불가피한 선별적 보상이라고 생각한다"면서도 "만일 총량이 굉장히 커서 거시적으로 물가에 영향을 주게 되면 당연히 정책당국과 얘기해 물가 영향을 어떻게 조절할지 한은도 관여해야 한다"고 답했다.
조직 내부 변화도 이 총재가 해결해야 할 과제 중 하나다. 한은이 지난 2020년 중장기발전전략(BOK 2030)을 세우고 컨설팅회사에 조직 자문한 결과 조직건강도가 100점 만점에 38점으로 낙제점 수준으로 나타났다. 이 후보자는 "앞으로 1~2개월 사이에 공감될 수 있는 안을 마련해 한은이 국내 최고의 싱크탱크가 될 수 있도록 개선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서소정 기자 ssj@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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