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경제 라영철 기자] 조선 후기 서울 경강(한성부 관할 지역 한강) 유역과 경기도 광주·양주 등 도성 바깥에선 시전 상인(市廛商人)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영향력을 키워 온 사상도고(私商都賈) 간 충돌이 잦았다.
경기도사에 따르면, 당시 삼전도(지금의 서울시 송파구 삼전동 지역)와 인근 송파 장시를 근거지로 활동한 손도강은 정부 허가 없이도 큰 자본을 보유하고 전국적인 유통망을 갖춘 사상도고의 대표적인 상인이었다.
그는 직접 생산지에서 건어물을 대거 사들여 서울과 인근 지역 민간 상인에게 도매로 팔아 큰 이윤을 남겨오고 있었다.
손도강은 원래 서울에 살던 부호였는데, 경강京江(한성부 관할 지역 내의 한강) 근처로 거주지를 옮겨 서울과 그 인근 경기지역을 드나들며 상거래를 해오고 있다. 양주와 광주에 사는 부호와 계약을 맺어 수천만 금을 마련한 뒤에 함경도 원산 지역의 어물 생산지에 가서 선박째 어물을 사들여 쌓아두고서 가격을 조절했다. 한편으론 양주와 포천 등의 중간유통 요지에서 북어를 매집해 자의로 난매하고 있다. (…) 손도강은 경기도 양주와 광주의 요로(要路)에서 난전(亂廛)하는 자들의 우두머리이다. - 『각전기사各廛記事』 인권人卷, 1804년 2월
특히 동해안 어물 판매권을 둘러싸고 경기 상인과 서울 시전 상인 간에 벌어진 난투극은 당시 상업계 상황이 어떠했는가를 말해 준다.
추석을 앞둔 1805년 8월 초순, 손도강은 수하의 상인 20여 명과 함께 동해안 원산에서 매입한 어물을 말에 싣고 서울로 향했다.
그가 사들인 북어와 대구, 김은 평소보다 수요가 많은 추석 시장에 내놓을 물품으로 무려 50여 바리에 달했다.

손도강은 서울과 가까운 양주 지역으로 접어들자, 바짝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는 일행에게 짐 실은 말 사이의 간격을 좁히고 주위를 잘 살필 것을 지시했다.
손도강 일행이 양주의 퇴계원(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퇴계원면) 쯤에 이르렀을 때 건장한 장정들이 길을 막고 나섰다.
그들은 서울 시전 상인들로 어물전 상인이 대다수였다. 다짜고짜 손도강에게 시장 거래 값을 쳐줄 테니 자신들에게 어물을 모두 넘기라고 겁박했다.
하지만 손도강은 단호하게 거래를 거부했다. 서울의 중간상인과 매매 약속이 돼 있기도 했지만, 이들 시전 상인에게 물건을 넘겨야 할 법적인 의무도 없었다.
게다가 퇴계원 지역은 한성부 관할 구역도 아니었으며, '금난전권(禁亂廛權)'이 미치는 곳도 아니었다.
'금난전권'은 조선 후기에 난전(亂廛)을 규제할 수 있도록 나라로부터 부여받은 시전(市廛)의 특권이다.
'금난전권'을 행사할 수 있는 지역은 도성 내와 그 바깥 10리 지역으로, 원칙적으로 한성부 관할로 한정돼 있었다.

따라서 다급한 쪽은 서울 시전의 어물전 상인들이었다. 이들은 원산과 통천 등지의 동북부 지방 건어물이 제대로 반입되지 않아 추석 시장에 내놓을 건어물 물량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해 경기 지역 민간 상인들은 생산지와 인근 집산지에 가서 건어물을 대규모로 사들였다. 또한 생산지에서 중간 상인이 가져오는 건어물까지 양주와 포천 지역에서 매입해 시전을 통하지 않고 바로 서울의 민간 상인에게 넘겨버렸기 때문이다.
손도강이 건어물 매입에 나섰다는 정보를 입수한 어물전 상인들은 서울로 들어오는 유통로 길목인 퇴계원에서 기다렸다가 이날 손도강을 찾아내 자신들에게 건어물을 판매하라고 몰아세웠다.
물량 부족이 심각했던 터라 흥정으로 보기에는 어려울 정도로 분위기는 거칠었다.
어물전 상인들은 자신들은 국가 공인을 받은 상인이고, 뒷배를 봐주는 권세가까지 두고 있다는 말을 흘리며 윽박지르듯 매매를 강요했다.
하지만 손도강은 애초부터 이들에게 건어물을 넘길 의사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어물전 상인과의 대치도 오래가지 않았다.
말투가 거칠어지며 실랑이가 일었고, 흥정은 곧바로 폭력 사태로 치달았다. 무리의 수가 많고 무기까지 지닌 손도강 일행이 물리력 행사에서 우위였다.
무려 수십 명의 사람이 별다른 말도 없이 순식간에 둘러서서 마구 때렸습니다. 심지어 칼을 빼 들어 꾸짖으며 욕까지 해댔습니다. 이런 횡포에 못 이겨 도피한 적이 이번만이 아닙니다. 만약 이들의 상행위를 엄하게 금하지 않으면 시전상인은 제대로 장사할 수 없어 결국은 끼니조차 잇기 힘들 정도로 궁색해질 것입니다. - 『각전기사各廛記事』 인권人卷, 1805년 8월

손도강은 퇴계원 난투 사건 2년 전부터 난전을 몰래 행했다는 이유로 어물전 상인들로부터 여러 차례 한성부에 고발됐다.
하지만 그때마다 자신을 난전이 아니라 떠돌며 물건을 파는 행상(行商)이라 내세우며 석방되곤 했다. 이러한 승소 배경에는 조정의 고위 관료나 권세가의 힘이 작용했음은 물론이다.
이처럼 손도강을 포함해 송파장을 전국적 장시로 성장시킨 사상은 18세기 중반 이후에는 '금난전권'이 미치지 않은 경기 지역에서 급성장했다.
사상은 대규모 자본을 앞세운 매점매석으로 막대한 이득을 취했고, 권력층과의 결탁을 통해 상권 다툼에서 유리한 입지를 확보해나갔다.
반면 왕실과 관아에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는 조건으로 물품의 고유 전매권을 가진 시전은 이전의 영향력을 점차 잃어갔다.
참고·인용: 경기도사 [경기문화재단]사진: 국사편찬위원회·규장각한국학연구원·간송미술문화재단
라영철 기자 ktvko2580@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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