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서울 동작구에 전셋집을 마련한 직장인 김성환씨(34·가명)는 부족한 전세금을 마련하기 위해 주거래 은행을 찾았다가 거절당했다. 김씨는 몇 곳의 은행을 돌아다닌 끝에 간신히 대출을 받을 수 있었지만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김씨는 "정부의 잘못된 부동산 정책에 집값은 물론 전셋값까지 천정부지로 치솟았는데, 실수요자 대출까지 틀어막는 것은 너무한 것 아니냐"며 "벌써부터 만기가 되는 2년 후가 두렵다"고 하소연했다.

[아시아경제 이광호 기자, 송승섭 기자]올해 들어 늘어난 전체 가계대출 증가액의 절반 이상이 실수요 성격이 강한 전세대출로 나타났다. 차주 10명 중 5명은 김씨와 같은 실수요자란 뜻이다. 김씨의 말처럼 대출이 늘어 집값이 오른게 아닌 집값이 올라 대출이 늘고 있는 상황인데, 정부의 대출 옥죄기에 기준금리 인상까지 더해지며 실수요자의 부담은 날로 커지는 형국이다.
가계대출 700조 육박…전세대출은 전체 증가액 51% 달해7일 금융권에 따르면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 등 5대 은행의 가계대출 잔액은 지난 달 말 현재 698조8149억원으로 지난해 말(670조1539억원) 대비 4.1%(28조6610억원) 늘었다.
이 중 주택담보대출은 19조6299억원 늘어 전체 가계대출 증가액의 68.4% 차지했다. 특히 전세대출이 14조7543억원 늘어 전체 증가액의 절반(51.4%)을 넘어섰다.
A은행 관계자는 "올해 들어 전국 집값과 전셋값 상승률은 두자릿수를 기록 중"이라며 "집값과 전셋값 상승에 따라 주택담보대출 및 전세자금대출도 늘어나는 것은 당연한데, 금융당국이 하반기 가계대출 증가율을 5~6%로 억제하기 위해 은행권에 대출 억제 요구 및 총량 관리를 하면서 가산금리는 오르고, 우대금리는 줄어들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금융당국의 압박에 은행들은 일제히 시장금리 상승세보다 더 높게 대출금리를 끌어올리며 대출을 억제하고 있다. KB국민은행과 신한은행은 전세자금대출 변동금리를 각각 연 2.64~3.84%에서 연 2.79~3.99%로, 연 2.77~3.87%에서 2.97~4.07%로 상향했다. 우리은행도 우대금리를 축소했고, NH농협은행은 지난달 가계대출 목표치를 초과해 대출 취급 중단됐다. 하나은행은 검토 중이다.
전문가들 "전세대출은 실수요자 상품…충격 최소화할 방안 마련해야"전문가들은 정부가 부동산 정책 실패를 무분별한 대출 조이기로 돌렸다고 지적한다. 금융권 내부에서는 결국 정권 초기부터 시작된 부동산 수요 옥죄기 정책으로 나타난 결과물이라는 목소리가 크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정부 정책은 집주인이 전세를 내놓거나 전환하기 어렵게 만들어 놨고, 가계부채 관리기조는 실수요자의 한도위축 우려를 불러일으켰다"며 "전세가격까지 오른 상황에서 미리 대출을 받으려는 차주가 많아졌다"고 분석했다.
박합수 KB국민은행 부동산수석전문위원은 "전셋값이 세입자의 의도와 다르게 올라가고 있다"며 "반전세나 월세로 가면 이자 부담이 그만큼 커지기 때문에 소득이 줄어드는 것과 같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전세자금대출의 경우 저소득층과 실수요자 주거안정이라는 차원에서 지나치게 가이드라인을 높이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꼬집었다.
송재원 신한은행 PWM 서초센터 팀장도 “양도세 규제가 많은데 집주인이 거주해야만 면제받을 수 있는 상황”이라면서 “급격하게 전세대출이 늘진 않았지만 심리적으로 한도를 줄이니 미리 땡겨서 전세대출을 받는 수요가 있는 거로 본다”고 분석했다.
오정근 건국대 정보통신대학원 금융IT학과 교수는 "정부가 시중에 돈이 많이 풀려 집값을 잡으려면 돈줄을 조일 수밖에 없다고 하는데, 공급은 하지 않으면서 (돈줄을 조여) 집값을 잡겠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며 "신학기와 가을 이사철을 앞두고 주택 매매와 임대 등이 많은데, 돈을 빌리지 못하는 실수요자들은 결국 2금융권과 대부업 등으로 손을 뻗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오 교수는 이어 "모든 차주에게 대출 규제를 똑같이 적용하는 것은 맞지 않다. 금융의 기본은 신용이고 신용에 따라 대출을 회수할 능력이 되면 빌려주면 된다"며 "금융당국의 대출 규제 완화가 시급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도 "금융당국이 올해 가계대출 증가율이 5~6%대를 넘지 않도록 은행권에 주문하고 있으나 한은 전망치인 경제성장률(4%)과 물가상승률(1.7%)만 반영해도 넘어서는 수준이고, 집값이 하루가 다르게 오르는데 자금줄을 이렇게 막무가내로 끊으면 결국 사금융을 쓰라는 이야기와 똑같다"며 "금융당국이 보다 정교한 방식으로 실수요자들의 충격을 최소화하는 관리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광호 기자 kwang@asiae.co.kr
송승섭 기자 tmdtjq8506@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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