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경제 송승섭 기자]서울에 거주하는 성지환(34·가명)씨는 최근 4000만원가량 모아뒀던 퇴직연금을 전액 해지했다. 예·적금과 현금화한 주식·비트코인 계좌 1억8000만원에 신용대출을 추가로 8000만원까지 받았지만 집을 사기엔 턱없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성씨는 "소득이 낮은 편이 아닌데도 대출길이 막혀 방법이 없다"며 "2금융권이나 P2P도 좋으니 대출 방법을 찾아 상급지(집값이 비싼 지역을 표현하는 은어)에 내 집 마련을 하고 싶다"고 털어놨다.
금융당국의 전방위 대출규제로 돈줄이 막힌 실수요자들이 우회로를 찾고 있다. 재테크·직장인 커뮤니티에서는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넘나들며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음)하는 방법이 공공연하게 올라오고 있다. 정부가 규제하고 시장이 이를 회피하며 각종 모순과 논란이 벌어진다는 지적이 나온다.
25일 한 직장인 커뮤니티 사이트에는 정부가 규제하지 않은 대출에 대해 논의하는 글이 화제가 됐다. 이용자들은 "퇴직연금을 중도 인출해 영끌하는 사람이 빈번하다"며 "정부가 만약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을 개정하거나 조건을 추가하면 이 방법이 막히는 것 아니냐"고 우려했다. 국민 노후 생활을 보장하기 위해 마련된 퇴직연금이 대표적인 영끌 수단이 된 셈이다.
금융권을 통해 확인해 본 결과, 퇴직연금은 통상 중도인출이 어렵다고 알려져 있지만 특정 사유와 요건을 갖추면 가능하다. 확정기여형(DC) 퇴직연금 가입자가 무주택자이면서 본인 명의로 주택을 구매하거나, 전세금 혹은 보증금을 부담하는 게 대표적인 예다. 지난 4월 주택금융공사가 발간한 ‘2021 주택금융리서치’에 따르면 2019년 기준 7만2830명이 2조7758억원을 중도 인출했다. 2015년보다 2~3배가량 많다. 이중 52%가 주택구입과 주거임차를 이유로 꼽았다.
집주인 남편에 배우자 아내?…덧칠 규제가 만든 세태배우자를 통한 신용대출 추가자금 마련법도 공유되고 있다. 지난해 말부터 주택 구입에 1억원이 넘는 신용대출을 활용하면 회수 등 규제를 받지만, 명의가 없는 배우자는 추가 신용대출이 가능하다. 이에 부부 중 고소득자가 1억원 초과대출을 받아 주택구매에 보태고, 저소득자가 1억원 한도에 맞춰 돈을 빌리는 대출법이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보험계약자라면 약관대출을 활용하라는 주문도 많다. 약관대출은 보험상품 해지환급금을 담보로 돈을 빌리는 대출상품이다. 보험사와 상품별로 다르지만 통상 환급금의 50~95%까지 가능하다.
일각에선 혼인신고를 하지 않거나 이혼한 뒤 배우자를 세입자로 들이는 경우도 있었다. 이 경우 법적인 ‘남남’이 된 배우자가 세입자 지위로 전세자금대출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혼인신고 시 회수위험이 있지만 수억에 달하는 자금을 마련할 수 있어 은밀하게 활용되는 상황이다.
공무원과 공기업 직원들은 연금대출과 사내대출을 검토하는 분위기다. 공무원 연금대출의 경우 최대 7000만원까지 대출이 가능한데 담보인정비율(LTV)와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규제에도 벗어나 있어서다. 이에 공공기관 직원들 사이에서는 최근 사내대출 한도가 7000만원으로 제한되고 LTV 적용까지 받게 되자 역차별 논란이 일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정부가 규제를 덧칠하며 만든 세태라는 지적이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는 "시장규제는 왜곡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라며 "정부가 집값을 잡지 못한 상황에서 규제를 시행하니 수요자들이 여기저기서 돈을 끌어모으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송승섭 기자 tmdtjq8506@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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