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 나열보다 의사결정 구조 개편 필요성 제기…보정심은 의료체계 장기비전, 건정심은 건강보험 정책 정당성 회복 역할해야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 전경
[메디게이트뉴스 조운 기자] 의대 정원 확대, 필수의료 강화, 의료전달체계 개편 등 정부의 의료개혁 과제가 반복적으로 추진되고 있지만, 정작 이를 논의하고 조정할 보건의료 거버넌스는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특히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와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가 형식적 심의기구 또는 단기적 수가 결정기구에 머무는 한, 의료개혁은 정책 발표 때마다 의료계 반발과 사회적 갈등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최근 보건행정학회지에 게재된 정웅기 존스홉킨스대 정치학과 연구자의 ‘한국 의료체계 거버넌스의 동학: 정부 역량과 정당성의 관점’ 논문은 오늘날 한국 의료현안의 원인을 단순한 의사 수 부족이나 수가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누적된 의료체계 거버넌스의 취약성에서 찾았다.
논문은 한국 의료체계가 건강보험이라는 강력한 가격 규제 장치를 갖고 있음에도 전달체계, 지불제도, 의료 질 관리, 의료인력 생산 등 핵심 영역에서는 정부의 체계적 관여가 제한적이었다고 봤다. 그 결과 국가와 의료계의 관계가 안정적으로 정립되지 못했고, 정책 추진 과정에서 갈등을 조정할 제도적 메커니즘도 충분히 발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구조에서는 정부가 새로운 의료정책을 내놓더라도 공급자인 의사들이 이를 정당한 결정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정책의 내용이 아무리 필요하더라도 결정 과정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의료계의 순응과 협조를 얻기 어렵고, 결국 정책 실행력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논문은 “의료 현안을 의미 있는 수준으로 진전시키려면 새로운 거버넌스의 운용을 가능하게 만드는 핵심 제도배열의 개편이 각종 정책개혁에 선행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구체적 과제로는 보정심 정상화와 건정심 내실화를 제시했다.
먼저 보정심은 보건의료기본법상 보건의료에 관한 주요 시책을 심의하고, 5년마다 수립되는 보건의료발전계획을 다루는 핵심 기구다. 그러나 그간 보정심은 의료체계의 장기 비전과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장으로 충분히 기능하지 못했다.
논문에 따르면 보정심은 2003년 첫 회의 이후 코로나19 전후인 2018년과 2021년 열린 것이 사실상 활동의 전부로 평가됐다.
의대증원 국면을 전후해 일부 변화가 있었지만, 이 역시 한계가 컸다는 평가다. 2023년 8월 25인 위원회가 구성되고, 같은 해 11월 의사인력 전문위원회와 필수의료확충 전문위원회가 운영됐지만, 논문은 전문위원회가 “실무를 위한 본격적인 연구를 수행하기보다는 회의에서 현안에 관한 위원들의 의견을 공유하는 정도의 활동에 그쳤다”고 지적했다. 이마저도 장기적으로 정례화되지 못하고 2023년 12월 마지막 회의 이후 중단됐다.
정 연구자는 현재와 같은 위원회 구조만으로는 보정심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 어렵다고 봤다. 보건복지부 장관이 당연직 위원장을 맡고, 정부 관료와 수요자, 공급자, 민간 전문가가 참여하는 기존 위원회 형태로는 의료체계의 장기 비전을 설계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논문은 “보정심은 보건의료에 관한 국가의 전반적인 계획을 수립하는 제도배열”이라며 “사회적으로 합의할 수 있는, 따라서 예측 가능성을 담보하는 동시에 지속 가능한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보정심이 단순한 정부 정책 보고·추인 기구에 머문다면 의료개혁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어렵다. 의료인력, 지역의료, 필수의료, 공공의료, 전달체계, 지불제도 등 보건의료 전반을 아우르는 장기 비전을 만들고, 시민·공급자·전문가가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논의할 수 있는 실질적 거버넌스로 재편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건정심 역시 개편 필요성이 크다. 건강보험은 한국 의료정책의 핵심 기전이지만, 건정심의 실제 기능은 상당 부분 수가 결정에 집중돼 있다. 그러나 법적으로 건정심은 요양급여 기준, 요양급여비용, 보험료율 등 건강보험 주요 사항을 폭넓게 심의·의결할 수 있는 기구다.
문제는 회의 방식이다. 현재 건정심은 보건복지부 차관을 위원장으로 가입자 대표 8명, 의약계 대표 8명, 공익 대표 8명 등 총 25명으로 구성돼 있다. 회의는 각 위원이 자신의 이해관계나 직역을 대표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논문은 이 구조가 “의료정책 전문가와 가입자 대표가 같은 자리에 혼재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수가에 관한 기술적 논의를 저해하는 결과를 낳고 있으며, 공급자가 문제를 제기하는 핵심 이슈 중 하나”라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건정심은 단순히 최종 표결을 하는 구조를 넘어, 전문성을 갖춘 별도 위원회나 소위원회가 수가와 지불제도 개편의 초안을 충분히 검토하고, 본회의가 이를 민주적으로 심의하는 방식으로 개편될 필요가 있다는 제안이 나왔다. 즉 의회의 본회의와 상임위원회처럼 전문성과 대표성을 분리·결합하는 구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논문은 “건정심도 의료정책의 전문성을 갖춘 박사급 연구자들이 각 집단의 입장을 대표해 수가 협상의 초안을 함께 작업할 수 있는 위원회를 설치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이후 본회의에 해당하는 건정심 전체 회의에서 이를 논의·의결하는 방식으로 전문성과 대표성을 함께 확보해야 한다는 취지다.
이는 최근 수가협상 결렬, 필수의료 보상 논란, 비급여 관리, 가치기반 지불제도 도입 등 건강보험을 둘러싼 주요 갈등과도 맞닿아 있다. 건강보험 재정과 수가 결정이 의료개혁의 핵심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음에도 그 결정 과정에 대한 신뢰가 낮다면, 의료계 반발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정 연구자는 의료정책의 정당성을 산출, 투입, 과정이라는 세 차원에서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특히 한국 의료체계에서는 “정책입안 과정의 질”에 해당하는 과정 정당성이 중요하다고 봤다. 정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이해당사자들이 관여하고, 그 과정에 효능감을 느끼며, 결과를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논문은 “거버넌스가 작동하는 과정이 갈등을 생산적으로 관리하는 역량의 정도를 가장 잘 드러내 준다”고 지적했다. 보정심과 건정심 개편은 단순히 위원회 하나를 손보는 문제가 아니라, 정부 정책이 의료계에 정당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작업이라는 의미다.
의료계 입장에서도 보정심과 건정심 개혁은 단순한 위원회 구성 문제가 아니다. 정부가 일방적으로 정책을 발표한 뒤 사후적으로 의료계에 수용을 요구하는 구조에서 벗어나, 정책 결정 초기 단계부터 근거와 쟁점을 공개하고 실질적 토론을 제도화하는 문제다.
특히 의대증원 사태 이후 의료계는 정부의 정책 결정 과정에 대한 불신을 강하게 드러내 왔다. 이 불신을 해소하지 못한 채 의사인력, 필수의료, 지역의료, 지불제도 개편을 추진할 경우 정책 내용과 무관하게 반발이 재연될 가능성이 크다.
논문은 한국 의료체계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거버넌스의 운용을 가능하게 만드는 핵심 제도배열의 개편”이 선행돼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그 구체적 과제가 바로 보정심 정상화와 건정심 내실화다.
의료개혁이 정책 발표와 의료계 반발을 반복하는 구조에서 벗어나려면 보정심은 보건의료체계의 장기 비전과 사회적 합의를 만드는 기구로, 건정심은 건강보험 정책의 전문성과 정당성을 회복하는 기구로 다시 설계돼야 한다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