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시간 26.07.26 14:49최종 업데이트 26.07.26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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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만실의 불빛이 꺼지고 있다

- 지역필수의료특별회계 '돌려막기'를 규탄하며,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호소문

[칼럼] 김재연 대한산부인과의사회장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메디게이트뉴스] 전북 익산의 홍성각 원장님으로부터 카톡 한 통을 받았다. 

"김재연 원장이 기자를 보냈더구만. 하지만 그동안 우리가 세미나에서 다뤘던 여러 가지 문제점, 대책 등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는데 늙어가는 산부인과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 안타깝고만."

홍성각 원장님의 카톡 한 줄에 부치는 답신으로 글을 쓴다.

"나 없으면 60대가 매일 당직… 의사인 딸도 분만은 절대 안 맡는다"는 제목의 기사가 나간 직후였다. 일흔을 넘긴 지금도 한 달에 스무 건이 넘는 분만을 직접 맡고 계신 노(老)의사의 짧은 문장 속에는, 우리 시대 지역의료의 모든 비극이 압축돼 있었다.

원장님의 말씀이 옳다. 언론은 늘 '늙어가는 산부인과'라는 서정적 프레임에 머문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노(老)산부인과 의사 개인의 헌신이 아니라, 그 헌신 없이는 단 하루도 굴러가지 않는 국가 의료 시스템의 구조적 붕괴다. 홍 원장님이 붓을 놓으시는 그날, 익산의 산모들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그분의 따님조차 "분만은 절대 맡지 않겠다"고 말하는 이 현실을, 우리는 언제까지 개인의 사명감에 기댄 채 방치할 것인가.

그래서 필자는 오늘, '늙어가는 산부인과'가 아닌 '늙어가도록 방치한 국가'에 대해 말하려 한다. 그리고 그 방치의 가장 최근 사례가 지금 이 순간 기획재정부의 예산 심의 책상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지역필수의료특별회계 '돌려막기'다.

하나, 재정 당국의 '눈속임 회계', 그 실체를 고발한다

2027년 1월 시행을 앞둔 지역필수의료특별회계 1조 2000억 원. 국회가 여야 합의로 통과시키고, 국민이 담배 개별소비세 인상까지 감내하며 마련한 이 재원을 두고, 지금 기획재정부는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가.

보건복지부가 애초 구상한 8000억 원 규모의 순수 신규 사업을 3000억~4000억 원 수준으로 반토막 내고, 나머지 8000억 원 이상은 이미 일반회계에서 집행되던 기존 보건사업의 '주머니'만 특별회계로 옮겨 담겠다는 것이다. 취약지 공중보건의 지원, 지방의료원 운영비, 권역외상센터·소아전문응급센터·고위험 산모·신생아 통합치료센터 예산, 이미 국민 세금으로 집행되고 있던 사업들이 이름표만 바꿔 특별회계 장부에 오르는 순간 국가는 국민을 상대로 조용한 기만을 완성하게 된다.

장부상 숫자로는 1조 2000억 원이 새로 생긴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상은 다르다. 일반회계에서 나가던 돈이 특별회계로 옮겨진 만큼 일반회계 보건예산은 그만큼 줄어든다. 결국 지역 의료 현장에 새로 유입되는 순증(純增) 재원은 3000억 원 남짓에 불과하다. 국민이 담배 한 갑을 살 때마다 부담한 개별소비세 인상분, 그 돈은 도대체 어디로 갔는가.

이것은 회계 처리가 아니라 국민을 상대로 한 재정적 기만이다. 새로 만든 통장에 원래 있던 돈을 옮겨 놓고 "잔고가 늘었다"고 자랑하는 격이다. 홍성각 원장님 같은 분들이 일흔의 나이에도 밤샘 당직을 서며 지켜온 이 나라의 마지막 분만실을, 재정 당국은 스프레드시트 한 줄의 계산으로 지워버리려 하고 있다.

둘, "곳간을 지켜야 한다"는 재정 논리, 그 얄팍함에 대하여

기획재정부의 논거는 늘 하나다. "총지출 증가를 억제해야 한다." 재정 건전성이라는 이 절대명제 앞에서 모든 정책은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태도다. 그러나 필자는 감히 묻고 싶다. 지금 우리가 아끼는 8000억 원은 5년 후 국가가 치러야 할 대가에 비하면 과연 얼마나 큰 돈인가.

분만 가능한 산부인과가 사라진 시·군이 전국에 50곳을 넘어섰다. 소아과를 찾아 새벽부터 줄을 서는 '오픈런'은 이제 뉴스거리도 되지 않는다. 심근경색 환자가 응급실 열두 곳을 전전하다 구급차 안에서 숨을 거두는 일이 되풀이되고 있다. 지방의료원은 만성 적자에 허덕이고, 국립대병원 필수과 전공의 지원율은 역대 최저를 기록했다. 이것이 2026년,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이라는 대한민국의 의료 현실이다.

한 명의 산모가 분만 중 사망하면 그 가정은 무너진다. 한 명의 아이가 응급 처치를 받지 못해 뇌 손상을 입으면 국가는 평생 그 사회적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한 지역의 의료 인프라가 무너지면 그곳의 젊은 부부는 아이를 낳지 않고 떠난다. 이 모든 것의 총합이 이른바 '지방소멸'이며, 그 사회경제적 비용은 학계 추산으로 연간 수조 원에 이른다.

재정 건전성이란 무엇인가. 곳간의 곡식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곳간이 있어야 할 마을 자체를 지키는 것이 진정한 건전성이다. 마을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곡식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지금 재정 당국이 8000억 원을 아끼기 위해 취하고 있는 태도는, 지붕에 불이 붙었는데 물값이 아까워 소화기를 사지 않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셋, 왜 반드시 '순증 8000억 원'이어야 하는가  

일각에서는 "3000억 원이든 8000억 원이든 어차피 지역의료에 쓰이는 돈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정책학의 기본 원리 안에 이미 들어 있다.

첫째, 정책의 효과는 '한계 투입'에서 발생한다. 기존에 집행되던 8000억 원은 현재 수준의 지역의료를 간신히 '유지'하는 데 쓰이고 있다. 그 재원으로도 붕괴를 막지 못했기에 국회가 여야 합의로 특별회계법을 제정한 것이다. 기존 재원의 이름표만 바꾸는 것으로 붕괴 곡선을 되돌릴 수 있다면, 애초에 이 법률은 필요하지 않았다. 홍성각 원장님 한 분의 어깨 위에 얹힌 하중을 덜어드리려면, 새로운 재원이 새로운 인력과 새로운 시스템으로 흘러 들어가야 한다.

둘째, 담배 개별소비세는 명백한 목적세다. 국민은 흡연 부담금 인상을 감내하면서 그 돈이 '지역 필수의료 확충'이라는 새로운 목적에 쓰일 것을 약속받았다. 그런데 그 돈이 기존 사업을 대체하는 데 쓰인다면, 국민이 추가로 부담한 세금은 결국 재정 당국의 살림 절감으로 흘러 들어가는 셈이 된다. 이는 조세 정의의 근본을 흔드는 일이다.

셋째, 특별회계 신설의 본래 취지는 '독립적·안정적 재원의 확보'다. 일반회계는 매년 예산 편성 과정에서 이런저런 명분으로 삭감될 수 있다. 그래서 특별회계라는 별도의 회계 단위를 만들어 필수의료 재원을 안정적으로 지키자는 것이 법 제정의 정신이었다. 그런데 지금 재정 당국의 방식대로라면, 특별회계는 '독립적 재원'이 아니라 '기존 예산의 분식 창구'로 전락한다.

김윤 의원이 "최소 8000억 원은 신규 재정이어야 한다"고 강조한 이유, 보건의료노조와 시민단체가 "꼬리표만 바꿔 다는 회계 처리로는 붕괴를 막을 수 없다"고 외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것은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원칙의 문제이며, 원칙이 무너지면 정책은 반드시 실패한다.

넷, '늙어가는 산부인과'가 아니라 '늙어가도록 방치한 국가'의 문제다

홍성각 원장님의 카톡을 다시 읽는다. "늙어가는 산부인과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 안타깝고만."

그렇다. 언론과 정부는 오랫동안 이 문제를 감상적으로만 다루어 왔다. 노(老)의사의 헌신, 아름다운 사명감, 지역을 지키는 인간 승리와 같은 이런 서사가 반복되는 동안, 정작 그분들이 은퇴한 다음날의 시스템에 대해서는 누구도 책임 있는 답을 내놓지 못했다. 그 사이 홍 원장님의 따님처럼 이미 의사가 된 다음 세대조차 "분만은 절대 맡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것은 개인의 선택이 아니다. 야간 당직과 응급 분만, 예측 불가능한 의료사고 위험, 낮은 수가, 소송 부담 등 국가가 30년간 방치해온 구조적 문제의 총합이 만들어낸 합리적 회피다. 이 회피를 되돌리려면 시스템 자체를 바꿀 만큼 충분한 새 재원이 필요하다. 3000억 원의 순증으로는 어림도 없다. 최소 8000억 원의 신규 재원이 분만 수가 정상화, 야간·응급 분만 인력 유인책, 의료사고 국가 책임 보험, 지역 수련병원 지원으로 흘러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만 홍 원장님의 따님이 마음을 바꿀 수 있고, 그래야만 익산의 다음 세대 산모가 두 시간을 헤매지 않고 분만실에 도착할 수 있다.

이 재원을 '기존 사업의 이름표 바꾸기'로 갈음하는 순간, 우리는 홍성각 원장님 세대의 헌신을 국가가 공식적으로 배신하는 셈이 된다. 필자는 그 배신을 결코 좌시할 수 없다.

다섯, 국민 여러분, 그리고 국회와 정부에 호소한다

이제 예산안 최종 확정까지 남은 시간은 길지 않다. 필자는 다음과 같이 간곡히 호소한다.

국민 여러분께서는 이 문제를 결코 '전문가들의 예산 다툼'으로 여기지 말아 주시기 바란다. 이것은 여러분의 생명과 여러분 가족의 미래에 직결된 문제다. 지역구 국회의원에게, SNS에, 그리고 이 사회 어느 자리에서든 목소리를 내주시기 바란다. "특별회계 1조 2000억 원 중 최소 8000억 원은 순수 신규 재원이어야 한다"는 원칙을 함께 지켜주시길 부탁드린다.

국회에는 요청드린다. 예산 심의 과정에서 이관되는 사업 항목을 전수 공개하고, 그 실질 순증액을 국민 앞에 투명하게 밝혀 주시라. 매년 집행 성과를 검증하는 보고 체계를 법제화해 주시라.

기획재정부에도 진심으로 청한다. 재정 건전성이라는 명제가 소중하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건전성은 국민의 생명 위에 세워질 때만 정당하다. 8000억 원의 순증 재원은 낭비가 아니라, 앞으로 국가가 부담해야 할 수십조 원의 사회적 비용을 미리 막는 가장 합리적이고 경제적인 투자임을 헤아려 주시길 바란다.

일흔의 홍성각 원장님이 오늘 밤에도 익산의 분만실 불빛을 홀로 켜고 계신다. 그러나 그 불빛은 한 사람의 사명감으로만 지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분이 붓을 놓으시는 날, 그 불빛이 꺼지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 국가의 몫이고 이 특별회계가 만들어진 이유다.

국민의 생명은 회계 처리의 대상이 아니다. 장부의 숫자를 지키자는 논리 앞에 우리는 분만실의 불빛과 응급실의 심장박동을 지켜야 한다는 원칙으로 맞서야 한다. 그것이 국가가 존재하는 이유이며, 우리가 세금을 내는 이유이며, 홍 원장님의 헌신에 우리 사회가 응답해야 하는 이유다.

부디, 이 호소가 헛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칼럼은 칼럼니스트의 개인적인 의견이며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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