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아산병원 영상의학과 서준범 교수가 17일 ‘의료 AX 전환, 제도적 인프라 구축을 위한 입법적 쟁점’ 포럼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의학한림원 유튜브
[메디게이트뉴스 조운 기자] 정부가 인공지능(AI)을 활용해 국민의 질병을 예측하고 지역·의료취약지의 진료 수준을 높이는 ‘AI 기본의료’를 추진하고 있지만, 정작 이를 구현하는 데 필요한 의료데이터의 수집·결합·장기 활용을 뒷받침할 법적 기반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초거대 의료AI를 개발하려면 병원 진료정보뿐 아니라 공공·사망·사회경제·개인생성 데이터를 국가 단위로 축적해야 한다. 그러나 현행 개인정보보호 체계는 수집 목적을 사전에 특정하고 필요한 최소한의 정보만 모은 뒤 목적을 달성하면 폐기하도록 규정하고 있어 새로운 AI 개발 방식과 충돌한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정부의 AI 기본의료 전략이 구호에 그치지 않으려면 디지털헬스케어법을 조속히 제정해 보건의료 데이터의 수집·연계·2차 활용과 정보 전송의 기준을 명확히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한민국의학한림원은 17일 ‘의료 AX 전환, 제도적 인프라 구축을 위한 입법적 쟁점’을 주제로 포럼을 열고 디지털헬스케어법 제정 필요성과 보완과제를 논의했다.
“미국은 1억2000만명 데이터 활용…개별 병원 데이터로 경쟁 어려워”
서울아산병원 영상의학과 서준범 교수는 의료AI가 특정 질환의 진단을 보조하는 수준을 넘어 의료서비스 전반을 지원하는 파운데이션 모델로 전환하고 있다며 국가 단위의 초대형 데이터 기반을 구축해야 한다고 밝혔다.
서 교수에 따르면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인허가한 의료AI 기반 소프트웨어는 1500개를 넘어섰고 국내에서도 올해 3월 기준 약 590개가 인허가됐다. 최근에는 진료기록과 의료영상, 검사결과, 생체신호 등을 종합해 질병 발생 가능성을 예측하고 의료진의 의사결정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기술이 발전하고 있다.
서 교수는 “미국에서는 단일 전자의무기록 시스템에서 약 1억2000만명의 데이터를 활용한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며 “국내에서는 어느 한 병원이 데이터를 모두 모아도 수백만명을 넘기 어려워 개별 의료기관의 데이터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국내 환자의 특성과 보건의료체계를 반영한 독자적인 의료 파운데이션 모델을 개발하려면 민간 의료기관의 진료정보와 건강보험 등 공공정보, 사망정보, 사회경제적 정보, 모바일·웨어러블 기기에서 생성되는 개인 건강정보를 폭넓게 결합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AI 파운데이션 모델은 특정 연구를 위해 데이터를 한 차례 사용하고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진료 결과와 장기 추적정보를 지속해서 추가하며 성능을 높여야 한다. 개발 초기에는 향후 필요한 정보를 모두 특정하기도 어렵다.
서 교수는 “초거대 모델을 개발하려면 폭넓은 데이터를 수집하고 지속해서 갱신해야 하지만 이는 개인정보의 목적 특정과 최소수집, 목적 달성 후 폐기 원칙과 충돌할 수 있다”며 “개인정보를 보호하면서도 국가에 필요한 의료AI를 개발할 수 있도록 별도의 기준과 절차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디지털헬스케어법은 매우 필수적이고 시급한 입법 과제”라며 “올해 법이 통과되지 않으면 정부 정책으로 채택된 AI 기본의료 전략을 수행하는 데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밝혔다.
개인정보법·생명윤리법 제각각…“가이드라인만으로 한계”
동국대 법학과 김재선 교수는 국내 보건의료 데이터 활용체계가 개인정보보호법과 생명윤리법, 의료법, AI기본법 등 여러 법률로 분산돼 현장에서 혼란이 발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첨단재생바이오법·암관리법·디지털의료제품법 등 개별 분야의 법률까지 중첩되면서 병원과 연구자가 어떤 법률에 따라 데이터를 수집하고 결합·활용해야 하는지 판단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기관별 임상연구심의위원회(IRB)와 데이터심의위원회(DRB)의 심의 기간과 판단에도 차이가 발생하고 있다.
미국은 건강보험의 이동성과 책임에 관한 법률(HIPAA)과 21세기 치료법을 통해 의료정보의 표준화와 연구 활용을 지원하고 있다. 일본은 차세대의료기반법, EU는 유럽건강데이터공간(EHDS), 독일은 건강데이터이용법, 핀란드는 사회보건데이터 2차 이용법을 각각 마련했다.
반면 국내에서는 의료데이터 가명처리와 결합·연계, 연구 목적 2차 활용 등의 상당 부분이 법률이 아닌 보건의료 데이터 활용 가이드라인에 의존하고 있다.
디지털헬스케어법에는 ▲보건의료 정보사업을 통한 데이터 수집·연계 ▲의료데이터중심병원 지정 ▲가명처리와 연구 목적 2차 활용 ▲기관 및 공용 보건의료정보심의위원회 운영 ▲개인의 의료정보 전송요구권 ▲전자의무기록 표준화 ▲규제샌드박스와 실증특례 등의 근거가 담겼다.
김 교수는 “의료데이터 활용을 위한 개별적인 제도 개선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며 “IRB와 DRB, 동의, 가명처리, 데이터 결합·연계 등 주요 쟁점에 대해 명확한 법령체계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의료영역에 AI 기술을 도입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단계는 이미 지났다”며 “어떤 기준과 절차에 따라 기술을 안전하고 효과적으로 활용할지, 속도만 앞세우기보다 신뢰할 수 있는 제도를 함께 설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보건복지부 최경일 첨단의료지원관
복지부, 4개 법안 통합…“11월 국회 통과 목표”
디지털헬스케어법은 전날 열린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에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계속심사로 넘어갔다.
현재 국회에는 국민의힘 안상훈 의원과 더불어민주당 서영석·권칠승·전진숙 의원이 각각 발의한 4개 법안이 계류돼 있다. 복지부는 4개 법안의 내용을 통합한 정부 대안을 법안소위에 제시했다.
정부 대안에는 비의료 디지털헬스케어 서비스의 정의와 육성, 의료데이터 2차 활용기관 지원, 사망자 의료데이터 활용 등의 내용이 포함됐다. 노동계와 시민단체가 우려하는 보험사로의 의료데이터 제공을 방지하기 위한 활용 원칙도 반영했다.
다만 의사협회와 약사회 등 보건의료단체가 요구하는 의료정보 생산자의 권리는 아직 포함되지 않았다. 복지부는 구체적인 조문이 제시되면 환자의 권리와 함께 선언적으로 규정하는 방안을 검토할 예정이다.
보건복지부 최경일 첨단의료지원관은 “정부 대안에 각 법안의 내용을 대부분 수용했고 관계부처 간 이견도 거의 해소됐다”며 “의료정보 생산자와 환자의 권리 문제를 제외하면 주요 쟁점은 상당 부분 정리됐다고 판단한다”고 말했다.
최 지원관은 “법안소위 위원이 바뀌면서 법안이 생소하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며 “10월 국정감사가 끝나면 11월 법안소위에서 다시 논의해 법안을 통과시키는 것이 목표”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