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들 "국내 의료 특성 고려한 독자 파운데이션 모델 필요"…데이터 개방하고 컴퓨팅 인프라 구축 지원해야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메디게이트뉴스 박민식 기자] 정부가 인공지능(AI) 3대 강국을 목표로 내건 가운데 의료 분야에서도 독자적인 ‘K-파운데이션 모델’ 구축을 위한 정책적 드라이브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파운데이션 모델은 대규모 데이터를 기반으로 사전 학습돼 다양한 작업에 범용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 AI 모델을 말한다.
이미 국내에서도 다양한 의료 AI 솔루션들이 병원 현장에서 사용되고 있지만, 대부분은 특정 질환이나 과제에 국한된 제품이다. 반면 파운데이션 모델은 다양한 질환을 동시에 다룰 수 있으며, 이를 기반으로 한 신규 서비스 개발로도 이어질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현재 미국과 중국의 빅테크 중심으로 의료 파운데이션 모델이 구축되고 있는 가운데, 전문가들은 “이 같은 글로벌 흐름 속에서 한국이 뒤처질 경우 ‘기술 종속’ 상태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전문가들이 독자 의료 파운데이션 모델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우선, 해외에서 개발된 파운데이션 모델을 국내 의료현장에 그대로 적용하기 어렵다는 점이 지적된다. 언어, 의료 시스템, 환자 구성 등 나라별 특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성균관대 삼성융합의과학원 정규환 교수는 “텍스트 기반 파운데이션 모델의 경우 한글과 영어가 혼재된 EMR(전자의무기록) 데이터에 대한 학습 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 외에도 국내 환자 구성, 보험 체계 등의 특성을 고려했을 때 해외 파운데이션 모델을 국내에서 활용하기엔 적합하지 않을 것”이라며 “글로벅 빅테크가 만든 AI라고 해서 국내 의료 현장에서 잘할 거란 보장은 없는 셈”이라고 했다.
해외 파운데이션 모델이 국내 의료 AI 시장을 잠식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실제 최근 일부 글로벌 모델들이 국내 의료AI 기업들이 강점을 가진 특정 분야에서도 더 뛰어난 성능을 보여주는 사례가 나오고 있다.
안산시화병원 호흡기내과 박형준 과장은 “해외에서 뛰어난 파운데이션 모델이 하나 나와버리면 기존 국내 기업들은 위험해질 수 있다”며 “기존 국내 의료 AI기업들이 가지고 있던 기술적 해자는 조만간 사라질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고려의대 예방의학교실 정재훈 교수는 “해외 파운데이션 모델 사용이 일반화되고 거기에 맞게 의료 제도가 설계되면 건강보험 재정이 해외로 유출되는 현상을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독자 모델 개발 필요성을 주장했다.
병원 보유 양질 데이터는 '강점'…의료 격차∙의료비 급증 문제 해결할 대안
전문가들은 국내 병원과 공공기관들에 양질의 의료 데이터가 축적돼 있다는 점도 독자 파운데이션 모델 개발에 나서야 할 이유로 꼽는다.
서울대병원 영상의학과 이동헌 교수는 “국내에는 양질의 의료 데이터가 풍부하다. 세계적으로도 우수한 수준으로 평가받고 있고, 코로나 팬데믹 시기엔 해외 연구 그룹에서도 국내 데이터를 선호했을 정도”라며 “이런 국내 의료 데이터의 잠재력을 활용한다면 의료 분야 파운데이션 모델 개발에서 상당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세브란스병원 신경외과 김휘영 교수는 “우리는 치료 성적이 좋은 데이터를 갖고 있다는 것도 강점”이라며 “의료 AI의 최종 목표가 단순히 진단을 넘어 치료 성적을 제고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경쟁력이 있는 셈”이라고 했다.
전문가들은 독자 파운데이션 모델이 수도권과 지방, 대형병원과 중소병원 간 의료 격차를 해소하는 측면에서도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예를 들어 영상의학과 전문의가 부족한 지방 중소병원에 영상의학 파운데이션 모델이 도입되면 환자 진료에 실질적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외에 의료비 상승의 부담을 줄이는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AI가 의료진의 업무를 일부 대체하거나 보조함으로써 인건비 절감에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글의 의료 파운데이션 모델 Med-PaLM M. 사진=구글
다만 전문가들은 실제 독자 파운데이션 모델 구축을 위해선 넘어야 할 산들이 많다고 입을 모은다. 우선 병원∙기관에 쌓여있는 데이터를 외부 기업이나 연구자들이 활용하기가 어렵다는 점이 애로사항으로 꼽힌다. 데이터 유출에 대한 우려, 상업적 이용에 대한 부정적 여론, 명확한 인센티브 부재 등으로 인해 병원들이 데이터 공유를 꺼린다는 것이다.
박 과장은 “관련 연구를 하기 위해 데이터를 받아보려 해도 각 병원의 DRB(데이터심의위원회)에 막히기 일쑤”라며 “미국은 기술과 자본력이 있고, 중국은 데이터를 개방했다. 그런데 우리는 예산은 적은데 규제는 미국∙유럽 수준으로 엄격하다”고 꼬집었다.
정재훈 교수는 “지금처럼 ‘개인의 민감정보니까 산업적 활용은 안 된다’는 접근 방식으론 해외 모델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며 “비식별화된 데이터는 산업화 자원으로 거래가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데이터 활용∙GPU 인프라 측면서 한계…정부, 전주기적 지원 필수
파운데이션 모델 개발에 필수적인 컴퓨팅 자원과 연구 인력의 부족도 또 다른 제약 요인이다. 아무리 좋은 데이터가 있더라도 이를 기반으로 AI 모델을 개발할 인프라와 인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실질적 성과로 이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고가의 GPU(그래픽 처리장치) 구매가 제한적이고, 데이터 추출과 전처리를 담당할 전문 연구 인력도 부족하다”며 “정부 차원에서 인력 양성과 GPU 인프라 확보를 적극 지원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파운데이션 모델은 개발 후에도 지속적인 학습과 운영이 필요한 만큼, 정부가 단순한 일회성 개발 지원을 넘어 장기적인 전략과 지원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김 교수는 “파운데이션 모델은 한 번 만들고 끝나는 게 아니라 지속적인 개선이 필요하기 때문에 개별 스타트업이 관리·운영하긴 쉽지 않다”며 “국가 주도로 병원 데이터를 집약해 모델을 개발하는 형태도 생각해볼 수 있다. 다만 데이터 기여 병원에 명확한 인센티브를 제공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정규환 교수는 “우리나라는 한때 의료 AI에서 앞서 있었지만, 지금은 규모의 경쟁에서 밀리며 뒤처지고 있는 실정”이라며 “데이터 수집부터, 모델 개발, 서비스 활용까지 정부가 전주기적 지원에 나서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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