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게이트뉴스 이지원 기자] 초고령사회 진입으로 뇌질환 환자는 늘고 있지만 필요한 치료를 제때 받을 수 있는 의료체계가 충분히 갖춰지지 않았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에 의료계는 응급치료와 의약품 공급, 퇴원 후 관리까지 치료가 끊기지 않는 의료체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대한신경과학회는 22일 과학기술컨벤션센터에서 'Brain Health and Access for All(모두가 누리는 뇌건강)'을 주제로 2026 세계 뇌의 날 기자간담회를 열고 뇌질환 환자의 치료 접근성 개선 과제를 논의했다.
대한신경과학회 서대원 이사장(삼성서울병원)은 인사말을 통해 "올해 세계 뇌의 날 키워드는 '뇌질환'이 아니라 '뇌건강'이며 또 하나의 키워드는 누구나 모두 누릴 수 있도록 하는 접근성"이라며 "뇌건강이 보건의료 정책의 핵심에 들어가야 하고 필수의료에서도 뇌질환이 중요하게 다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뇌졸중 환자 2050년 35만명…전문의 배치만으론 부족, 보상도 필요
국내 뇌졸중 환자는 현재 연간 15만명 이상에서 2050년 약 35만명으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지역에 따라 골든타임 안에 치료받기 어려운 문제는 이어지고 있다.
지역별 뇌졸중센터와 전문의가 부족해 치료 가능한 병원을 찾지 못하거나 전원이 지연되고 있다. 응급실 병상이 있어도 뇌졸중 환자를 진료할 배후진료 전문인력이 없으면 환자를 수용하기 어렵다.
대한뇌졸중학회 김태정 홍보이사(서울대병원 신경과·중환자의학과)는 "초고령사회에서는 뇌졸중 환자의 급증을 피하기 어려운 만큼 골든타임 안에 치료받을 수 있는 시스템을 미리 구축해야 한다"며 "거주 지역과 관계없이 신속한 진단과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응급실 신경계 전문인력과 지역 뇌졸중 치료 네트워크를 확충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김 홍보이사는 권역응급의료센터에 신경계 전담 전문의를 배치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신경계 전문의가 응급실에서 환자의 중증도와 수술·시술 가능 여부를 판단하고 이를 119와 지역 의료기관에 전달하면 병원 선정과 전원에 걸리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는 설명이다.
앞서 대한뇌졸중학회와 소병훈 의원실은 국회 간담회에서 응급실 신경계 전담의 도입과 급성 뇌졸중 치료체계 개선 방안을 논의했다. 이후 소 의원은 응급실에 배후진료과 전문의를 의무적으로 두도록 하는 응급의료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다만 전공의 충원이 어려운 가운데 충분한 인력 지원 없이 전문의 배치를 의무화하면 기존 의료진의 업무 부담이 커지고 해당 진료과 기피를 심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에 김 홍보이사는 "기존 의료진이 할 수 있는 업무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의무조항으로 들어간다면 새로운 인력을 고용할 수 있도록 관련 예산도 배정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업무 부담은 높지만 진료했을 때 신경과 의사에게 돌아오는 보상이 없다. 인턴이나 저연차 전공의가 이런 모습을 경험하면 뇌졸중 환자를 보기 싫을 수밖에 없다"며 응급 신경계 진료에 대한 보상체계와 인력 지원이 함께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권도영 홍보이사 발표자료 중 일부.
해외서 쓰는 파킨슨병 치료제, 국내선 '패싱'…뇌전증 응급약은 잇단 공급 중단 위기
파킨슨병은 약물치료에 대한 반응성이 높아 적절한 치료를 받으면 환자의 기능과 삶의 질을 개선할 수 있다. 하지만 국내에는 경구제 외 치료 옵션이 부족해 해외에서 사용되는 주사·주입형 치료를 국내 환자는 선택하기 어렵다.
대한파킨슨병 및 이상운동질환학회 권도영 홍보이사(고려대안산병원 신경과)는 해외에서는 지속피하주입제와 피하주사제 등 다양한 치료 옵션이 개발돼 사용되고 있지만 국내에는 도입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권 홍보이사는 "해외 학회에서는 뇌심부자극술과 주사·주입형 치료를 이용해 삶의 질을 높이고 합병증을 줄이는 연구 결과가 계속 나오지만 한국은 빠져 있다"며 "국내에는 약이 없으니 관련 연구와 논의에서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국내 도입이 지연되는 원인으로는 낮은 약가와 새로운 제형·약물전달기술의 가치를 충분히 인정하지 않는 약가 산정 방식이 꼽혔다. 새로운 정제기술이나 전달방식이 적용됐더라도 기존 레보도파와 같은 성분이라는 이유로 가격을 충분히 인정받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약가가 다른 국가의 가격 결정에 참고되는 점도 다국적 제약사가 국내 출시를 건너뛰는 요인으로 지목됐다.
권 홍보이사는 "한국에서 낮은 가격으로 판매하면 더 큰 시장에서도 높은 가격을 받기 어렵기 때문에 아예 한국을 건너뛰는 경우가 많다"며 "기존에 들어와 있던 약제는 철수했고 수많은 약이 해외에서 사용되고 있지만 한국에는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미 특허가 만료돼 회사 입장에서 수익성을 기대하기 어려운 약물은 한국에 들어올 이유가 더 줄어든다"고 설명했다.
국내에 남아 있던 비경구 파킨슨병 치료 옵션도 줄어들고 있다.
권 홍보이사는 "국내에서 먹는 약 이외에 유일하게 남아 있던 정맥주사제도 6월부터 생산이 중단됐다"며 "환자가 갑자기 약을 먹지 못하거나 수술을 받아야 할 때 사용할 치료 수단이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권 홍보이사는 "세계적으로 표준이 된 약제조차 국내에서 쓰지 못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위상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부분"이라며 해외에서 검증된 치료 옵션의 신속한 허가와 도입, 급여평가·보험등재 절차 개선, 새로운 제형과 약물전달기술의 가치 인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뇌전증 분야에서는 응급치료에 사용하는 필수 주사제가 잇따라 생산·공급 중단 수순을 밟고 있다.
대한뇌전증학회 황경진 수련교육이사(경희대병원 신경과)는 뇌전증지속상태 치료에 사용하는 디아제팜주와 페니토인주의 생산·공급이 이미 중단됐고 포스페니토인주도 공급 중단이 예정돼 있다고 밝혔다.
뇌전증지속상태는 발작이 5분 이상 이어지거나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발작이 반복되는 응급질환이다. 치료가 늦어질수록 뇌손상과 사망 위험이 커 신속한 약물 투여가 필요하다.
황 수련교육이사는 "약이 있어야 치료할 수 있다"며 "응급 항발작 주사제가 사라지면 진료지침이 있어도 현장에서는 치료 자체가 불가능해진다"고 말했다.
필수약 공급 중단의 원인으로는 낮은 수익성이 지목됐다. 현재 퇴장방지의약품 제도가 운영되고 있지만 낮은 약가로 생산 원가와 물류비를 보전하기 어렵고, 지정 의약품의 공급을 강제할 법적 장치도 부족하다는 설명이다.
황 수련교육이사는 "우리나라는 필수약의 실질적인 원가 반영이나 약가 인상 기준이 미흡하고 공급 중단 전 사전예고나 일정 물량의 비축 의무도 없다"며 "제약사가 필수약 공급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인센티브도 부족하다"고 말했다.
그는 응급 항발작제의 국가필수의약품 별도 지정과 실제 원가를 반영한 약가·원가 보전, 중앙 비축과 권역별 재고 모니터링, 공급 중단 사전예고 의무화 등을 제안했다.
이상범 공보부회장 발표자료 중 일부.
신경계 질환, 거동 어려워지면 치료 단절…상급병원-지역 재택의료 연계 필요
치료제에 접근할 수 있더라도 거동이 어려워지면 치료 공백으로 이어질 수 있다. 루게릭병과 진행기 파킨슨병 등 중증 신경계 질환은 병이 진행되면서 병원 방문이 어려워지고, 외래 진료와 기존 의료진과의 연결까지 끊길 수 있다.
이에 대한신경과의사회 이상범 공보부회장(서울신내의원)은 중증 신경계 질환 환자가 퇴원한 뒤 지역사회 재택의료로 안정적으로 전환될 수 있도록 상급종합병원과 지역 의료기관이 함께 관리하는 공유진료 체계를 제안했다.
이 공보부회장은 "신경계 질환 환자가 재택의료를 받는다면 처음 진단하고 치료를 시작한 상급종합병원의 재택의료팀이 개입해야 한다"며 "거동 불편으로 외래가 단절되는 전환기에는 환자가 가장 신뢰하는 기존 병원의 신경과 의료진이 참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급성기 병원에서 퇴원한 뒤 환자의 상태가 불안정한 1~3개월을 재택의료 개입의 '골든타임'으로 꼽았다.
이 기간에는 상급종합병원의 신경과 의사와 간호사, 사회복지사 등 다학제팀이 가정 내 치료·돌봄 환경을 마련하고, 상태가 안정되면 지역 일차의료기관이나 재택의료센터로 이관하는 체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만 현행 행위별 수가만으로는 방문에 필요한 이동시간과 다학제팀 인건비, 의료기관 간 환자 조정 업무를 충분히 보상하기 어렵다.
이 공보부회장은 중증도와 진료시간을 반영한 심층 방문진료료, 다학제 코디네이션 수가, 퇴원 전환기 묶음수가와 성과 인센티브를 결합한 다층적 수가체계를 제안했다.
그는 "재택의료는 의사가 집을 한 번 방문하는 행위만으로 끝나지 않는다"며 "환자의 상태를 수시로 확인하고 여러 직종과 자원을 연결하는 과정까지 보상해야 중증 신경계 질환 환자를 지속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서 이사장은 "국민이 뇌건강에 관심을 갖고 예방과 관리에 접근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춰야 한다"며 "더 많은 사람이 건강수명을 누릴 수 있도록 뇌건강에 대한 접근성을 높여야 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