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게이트뉴스] 생명을 살리기 위해 밤낮없이 뛰는 곳은 분만실만이 아닙니다. 응급실·중환자실·수술실·소아병동·정신과 폐쇄병동·일차의료 외래 등 모든 의료현장이 초 단위 판단과 불확실성 속에서 최선의 결정을 요구받습니다. 그런데 최근 자연분만 후 신생아가 뇌성마비를 진단받은 사건을 계기로 의료진의 불가항력적 결과까지 형사처벌의 대상으로 삼는 흐름이 커지고 있습니다. 이는 산부인과를 넘어 전체 필수의료의 기반을 위협합니다. 의료현장은 결코 범죄현장이 아닙니다.
1. 결과 중심의 사후 심판이 모든 진료를 위축시킨다
의료인은 제한된 정보와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그 순간 가능한 최선을 선택합니다. 분만 중 산모·태아 상태가 시시각각 변하듯, 응급실의 패혈증 치료, 중환자실의 고위험 처치, 수술 중 갑작스러운 출혈 등 다른 진료현장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사후적·결과론적 평가는 의료행위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단편적으로 재단하며, '뒤돌아보니 다른 선택이 있었을 것'이라는 가정으로 형사책임을 묻습니다. 이 흐름이 강화되면 의사들은 과감한 결단 대신 방어적·소극적 진료로 물러설 수밖에 없고, 그 피해는 결국 환자와 가족에게 돌아갑니다.
2. 의학은 확률의 과학—인과는 단선적이지 않다
뇌성마비, 패혈증 사망, 수술 후 감염·출혈 등 많은 합병증은 장기간의 복합 요인과 확률적 위험이 겹쳐 발생합니다. 몇 시간 혹은 며칠의 의료 행위만을 잘라 인과관계를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세계 각국은 이러한 특수성을 인정해 무과실·불가항력 보상제를 마련하고, 피해자 보호와 의료 지속가능성을 함께 추구합니다. 한국도 결과가 아니라 진료 과정과 진료지침 준수 여부를 기준으로 평가기준을 바꿔야 합니다.
3. 개인 처벌로는 시스템 리스크를 줄일 수 없다
분만과 응급, 외상, 소아, 정신건강 등 필수의료 전반이 인력 부족·지역 격차·이송·협진 체계 취약이라는 삼중고를 겪고 있습니다. 사건이 날 때마다 개별 의료진을 기소해도 이러한 구조적 위험은 줄어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의료인력 이탈을 가속화해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할 뿐입니다.
4. 환자 보호와 의료 지속성을 위한 6대 제도개선
1) Safe Harbor(면책·감면) 법제화
표준지침과 합리적 의사결정을 입증하면 형사책임을 예외·감경하도록 명문화해, 결과가 아닌 행위 기준으로 과실을 판단해야 합니다.
2) 무과실·불가항력 보상제의 전 진료과 확대
분만을 넘어 응급·중환자·외상·소아·정신과 등 필수의료 전반으로 적용하고, 신속·예측 가능한 보상으로 피해자와 가족의 고통을 줄입니다.
3) 독립 전문심의위원회와 수사·기소 가이드라인 의무화
형사 절차 개시 전, 학회가 추천하는 전문가 패널의 행위 적정성 심의를 거치도록 하고, 지침 준수가 확인될 경우 형사절차를 최소화합니다.
4) 권역 협진·이송 네트워크 및 취약지 인력 인센티브
24시간 가동 가능한 응급·분만·소아·정신 응급 협진체계와 인력·수가 인센티브로 접근성을 높입니다.
5) 국가 주도 환자안전·인과평가 데이터 레지스트리
주산기·응급·외상·정신응급 등 주요 영역의 베이스라인 위험 데이터를 축적해, 단일 사건을 일반화해 처벌하는 일을 막습니다.
6) Disclosure & Offer(투명 설명·신속 보상) 제도화
중대한 위해가 발생하면 의료기관이 투명하게 설명하고 즉시 지원할 수 있는 법·재정적 기반을 마련해 분쟁을 줄입니다.
5. 신뢰 회복은 ‘처벌 강화’가 아니라 ‘시스템 개선’으로
서울특별시의사회는 환자 안전과 권리를 최우선 가치로 삼습니다. 그러나 불확실성과 불가항력을 무시한 형사처벌의 잣대는 의료를 위축시키고 더 큰 피해를 낳습니다.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면책이 아니라 정당한 기준입니다. 최선을 다한 의료가 존중받고, 안타까운 결과는 공동체가 안전망으로 함께 책임지는 사회야말로 진정한 환자 보호입니다.
응급실의 새벽, 분만실의 긴박한 순간, 중환자실의 치열한 사투, 소아병동의 밤샘 관찰—이 모든 곳은 생명을 살리는 현장이지 범죄현장이 아닙니다. 국가와 사회가 제도를 바로 세워줄 때, 의료진은 오직 환자의 생명만을 바라보며 최선의 진료를 이어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산모와 아기, 그리고 모든 환자의 안전을 지키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