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가치평가 확대 필요성 공감하지만 객관적 수치화가 과제"…희귀질환 신속등재·고가약 선별급여 검토
[메디게이트뉴스 이지원 기자] 신약이 환자의 생존기간을 몇 개월 늘렸다는 수치만으로 치료의 가치를 온전히 설명하기는 어렵다. 일부 환자에게는 장기생존이나 완치에 가까운 효과로 이어질 수 있고, 치료를 통해 되찾은 일상은 직장 복귀와 가족 돌봄, 사회적 생산성으로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이에 혁신신약의 가치를 평가할 때 기존 비용효과성 평가에서 충분히 포착하기 어려운 삶의 질과 생산성, 돌봄 부담 등 사회경제적 가치를 보다 폭넓게 반영해야 한다는 제언이 나왔다.
4일 국회에서 열린 '지속가능한 보건의료를 위한 혁신신약 가치평가의 새로운 방향' 정책포럼에서는 임상현장과 경제·정책적 관점에서 혁신신약의 가치평가와 환자 접근성 개선 방향에 대한 논의가 진행됐다.
현재 신약의 급여 여부를 판단하는 과정에서는 기존 치료 대비 추가 비용과 치료효과 등을 비교하는 비용효과성 평가가 활용된다. 대표적으로 ICER(점증적 비용효과비)를 사용하고 있으며, 이는 신약을 사용해 QALY(질보정생존연수) 1단위를 추가로 얻는 데 어느 정도 비용이 필요한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신약을 평가하는 시점에는 장기적인 치료 효과를 모두 확인하기 어렵고, 환자가 치료를 통해 일상과 직장을 유지하거나 가족 내 역할을 이어가면서 발생하는 가치까지 충분히 반영하기도 쉽지 않다.
대한종양내과학회 안희경 보험정책이사(삼성서울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
생존기간 몇 개월 이상의 가치…장기생존·일상복귀까지 고려해야
대한종양내과학회 안희경 보험정책이사(삼성서울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는 혁신신약의 가치를 단순한 중앙생존기간이나 초기 임상지표만으로 판단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안 이사는 PD-L1 발현율 50% 이상 비소세포폐암에서 키트루다와 기존 표준치료를 비교한 연구를 사례로 들었다. 무진행생존기간 중앙값은 각각 7.7개월과 5.5개월로 차이가 2.2개월이었지만, 키트루다 치료군에서는 5년 동안 질병이 진행하지 않은 환자가 12.8%였다.
안 이사는 장기간 추적했을 때 나타나는 치료가치가 급여평가 시점에는 충분히 확인되지 않을 수 있고, 환자의 직장 유지와 가족 돌봄 등 사회적 가치도 기존 평가에서 충분히 반영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이어 혁신신약의 가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와 함께 실제 환자가 치료제에 접근하는 과정의 병목도 짚었다.
신약에 건강보험이 적용되면 암환자 산정특례 등으로 환자 부담이 크게 낮아지지만, 급여 전에는 고가의 약값을 환자가 부담해야 해 실제 치료 선택지가 제한될 수 있다는 것이다. 희귀암과 희귀변이 환자의 경우 환자 수가 적어 대규모 임상시험을 수행하기 어려워 충분한 근거를 만들지 못하는 문제도 있다.
이에 안 이사는 표준치료가 없는 말기암이나 희귀암·희귀변이 환자에게 보다 유연한 치료 접근 경로를 마련하고, 실제 진료현장에서 축적되는 RWD(실사용데이터)와 연구자주도 임상연구 등을 활용해 사후 근거를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홍석철 교수는 "지금은 너무 단차원적인 평가를 하고 있는 것"이라며 "단순하게 사망률 감소라든가 생명 연장뿐만 아니라 생산성의 변화라든가 삶의 질의 변화 이런 것까지 좀 봐야한다"고 말했다.
고령화와 생산연령인구 감소가 동시에 진행되는 상황에서는 환자가 건강을 회복하거나 유지하는 것이 노동공급과 생산성뿐 아니라 가족의 돌봄 부담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설명이다. 또한 신약 사용으로 입원이나 다른 치료가 줄어든다면 약제비 증가와 함께 다른 의료비가 얼마나 감소하는지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홍 교수는 ICER 기준을 단순히 높이거나 낮추는 데 그치기보다 질환 특성과 신약이 만들어내는 가치를 객관적인 근거로 측정해 반영할 수 있는 다차원적 가치평가 체계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이어진 토론에서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정완교 교수도 건강보험 관점에서 신약의 가치를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봤다.
정 교수는 "신약이 건강 증진과 삶의 질을 개선하는 효과가 있고, 그와 더불어 입원일수와 입원비 감소의 효과가 있다"며 "신약에 대한 적극적인 도입이 오히려 건강보험 지출을 줄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왼쪽부터) 한국글로벌의약산업협회 최인화 전무,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정완교 교수, 보건복지부 보험약제과 김민정 사무관
정부 "가치평가 확대 필요성 공감하지만 수치화 과제"…선별급여 TF 구성
이날 정부 측은 재발 방지와 삶의 질 등 기존 지표만으로 충분히 포착하기 어려운 가치를 신약 급여평가에서 고려할 필요성에는 공감했다. 다만 이를 실제 약가와 급여 결정에 반영하려면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객관적인 평가기준을 마련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보건복지부 보험약제과 김민정 사무관은 "정부에서도 삶의 질이나 재발 방지, 이후 고가의 약을 쓰지 않도록 하는 측면에서 보수적으로만 하지 않고 다양한 관점에서 신약 등재와 급여 확대를 검토하고 있다"며 "재발 방지에 대한 가치, 환자나 가족에 대한 삶의 질의 가치도 담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다만 이걸 어떻게 담느냐, 숫자를 어떻게 할 것인가가 과제"라며 "이러한 가치를 객관화해 국민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기준으로 만드는 작업이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해 정부는 현재 ICER 임계치와 관련한 연구도 진행하고 있다. 이뿐 아니라 평가 과정에서 남는 불확실성을 사후 근거 생산으로 관리하면서 환자의 치료 접근을 앞당기기 위한 제도 개선도 추진하고 있다.
김 사무관은 희귀질환 치료제 신속등재 시범사업과 관련해 사후 근거 생산을 전제로 급여 진입을 앞당기고 일부 협상 절차를 생략하는 방식도 추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시범사업의 실효성이 확인되면 향후 제도화 가능성도 검토한다는 방침이다.
김 사무관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선별급여 태스크포스(TF)를 구성했다"며 "사회적 요구도가 높지만 고가인 약제 등에 대해 환자 본인부담률을 30~80% 수준으로 차등 적용할 수 있도록 제도를 검토하기 위한 연구를 진행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산업계는 정부가 추진하는 방향에는 공감하면서도 제도 개선의 범위와 속도를 더 확대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한국글로벌의약산업협회 최인화 전무는 희귀질환 치료제 100일 신속등재 시범사업을 환영하면서도 일부 품목만 신속등재하는 방식으로는 환자가 체감할 수 있는 제도 개선에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최 전무는 "5개 정도의 신속등재만으로 정부가 추진하는 제도 개선의 취지를 충분히 구현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환자단체와 이야기해 보면 '5개, 100일이 중요한 게 아니라 모두 등재하는 제도를 만들어 달라'고 한다"고 말했다.
정부는 신약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제도적 유연성을 확대하는 동시에 이를 뒷받침할 건강보험 재정 여력을 어떻게 확보할지도 과제로 제시했다.
김 사무관은 "현재 보장성을 강화하면서 보험의 지속가능성도 높여야 하는 두 가지를 다 달성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며 제네릭 약가를 비롯한 기존 약제비 구조를 조정해 확보한 재원을 신약 접근성 강화로 연결하는 선순환 구조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약가 조정만으로 건강보험 재정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며, 향후 의약품 사용량을 합리적으로 관리하는 방안도 함께 마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