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 아주대학교 의과대학 의료정보학교실 박래웅 교수가 ‘AI 대전환, 보건의료 혁신의 미래를 열다’ 국제 심포지엄에서 발표했다.
[메디게이트뉴스 조운 기자] 우리나라가 전 국민 건강보험과 높은 전자의무기록(EMR) 보급률을 바탕으로 세계 최고 수준의 의료데이터를 보유하고 있지만, 실제 인공지능(AI) 개발에 활용하기까지 수개월에서 수년이 걸리는 구조적 병목을 해소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AI 알고리즘 개발 과정의 80~90%가 데이터 확보와 정제에 투입되는 만큼 데이터 접근 절차를 간소화하고 병원별 EMR을 표준화하는 한편, 개인정보 침해 위험과 데이터 품질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는 제언이다.
아주대학교 의과대학 의료정보학교실 박래웅 교수는 28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서울 앰배서더 풀만에서 개최한 ‘AI 대전환, 보건의료 혁신의 미래를 열다’ 국제 심포지엄에서 ‘AI 기반 보건의료 혁신’을 주제로 이같이 밝혔다.
박 교수는 “우리나라는 기술도 데이터도 이미 갖추고 있다. 이제 남은 과제는 데이터를 안전하게 흐르게 하는 것”이라며 데이터 접근성과 표준화, 수가·보상체계 개선을 주문했다.
전 국민 의료데이터 쌓였지만 접근에 수년…병원마다 절차도 제각각
박 교수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국민의 약 98%가 건강보험, 2%가 의료급여에 가입해 사실상 전 국민의 의료이용 데이터가 축적되고 있다. 의료기관의 전자의무기록(EMR) 보급률은 약 94%이며, 심평원이 보유한 건강보험 청구데이터는 누적 약 3조건에 이른다.
건강정보 고속도로 사업을 통해 약 1263개 기관이 국제 의료정보 전송표준인 FHIR 기반으로 데이터를 전환하고 있으며, 국내 대학병원 상당수는 공통데이터모델인 OMOP-CDM도 구축했다. 국내 AI 의료기기 허가는 2025년 153건, 누적 약 400건이다.
하지만 의료 AI 개발시간의 80~90%가 데이터 확보와 정제에 쓰이고 있다. 박 교수는 “좋은 데이터를 많이 보유하고 있지만 실제 사용하기는 매우 어려운 환경”이라며 데이터 접근에만 수개월에서 수년이 걸린다고 지적했다.
그는 의료 AI 개발을 가로막는 6가지 병목으로 ▲데이터 접근성 ▲병원 원천데이터 추출 ▲기관별 비표준화 ▲데이터 품질 ▲인허가와 수가 ▲불명확한 구매 주체를 꼽았다.
병원 데이터를 확보하려면 병원 협약부터 임상시험심사위원회(IRB), 데이터심의위원회(DRB), 가명처리, 반출심사, 데이터 결합 등을 거쳐야 한다. 병원장의 승인을 받아도 진료과나 전산팀, 정보보호 부서에서 데이터 제공을 거부할 수 있고 의료기관마다 판단 기준도 다르다.
박 교수는 “병원마다 여러 층의 장벽을 통과해야 하는데 왜 데이터 제공이 불가능한지조차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며 “IRB와 DRB를 통합해도 전문성이 달라 실제 내부 절차는 그대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DRB의 개인정보 노출 위험 판단 역시 기관과 위원에 따라 달라지는 만큼 정부나 공신력 있는 기관이 이를 점수화하는 평가도구를 개발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위험도가 높으면 외부 반출 대신 병원 내부에서만 분석하도록 하는 등 위험에 비례한 활용체계를 마련하자는 것이다.
병원별 EMR 제각각…“FHIR만으로 데이터 의미·품질 보장 못해”
병원마다 EMR의 구조와 의미, 관리 주체가 다른 점도 문제로 지목됐다. 병원이 데이터 제공에 동의해도 EMR 관리업체가 접근을 제한하는 ‘벤더 종속성’이 발생하지만, 국내에는 미국의 21세기 치료법처럼 의료정보 차단을 금지하는 명확한 규정이 부족하다.
데이터 품질도 해결해야 할 과제다. 실제 병원 데이터에는 남성 환자의 자궁적출술 기록이나 출생 전·사망 후 처방, 999세 환자, 키 40m 등 성립하기 어려운 정보가 포함돼 있다. 이런 오류가 정제되지 않은 채 AI 학습에 사용되면 알고리즘의 편향과 성능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
박 교수는 FHIR가 데이터 전송 형식을 통일할 뿐 의미와 품질까지 보장하지는 않는다고 설명했다.
그는 “FHIR는 규격화된 배송가방과 같고 그 안에 무엇을 담을지는 별개의 문제”라며 “검사 처방시간과 검체 채취시간, 결과 보고시간도 병원마다 기록 방식과 의미가 달라 표준화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이어 “현재 KR Core는 14개 항목, 77개 데이터셋으로 제한돼 의료 AI 연구에 활용하기에는 부족하다”면서도 “우선 의료기관에 빠르게 보급한 뒤 표준화 항목을 확대해야 한다”고 밝혔다.
“심평원, 의료 AI 혁신과 재정 안정 잇는 핵심 기관”
박 교수는 의료데이터 2차 활용을 활성화하기 위해 ▲데이터 접근절차 간소화 ▲2차 활용의 법적 근거 명확화 ▲KR Core 등 데이터 표준 확산 ▲개인정보 노출 위험 평가도구 개발 ▲데이터 품질지표 마련 ▲AI 실증 테스트베드 확대 등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특히 심평원이 방대한 건강보험 데이터를 보유하고 급여 여부를 판단하는 만큼 의료 AI 개발부터 실증, 급여 적용까지 연결하는 신뢰 중개자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심평원은 연간 약 30억건의 청구를 심사하고 누적 약 3조건의 데이터를 관리한다. 가명·익명처리한 데이터를 연구자에게 제공해 실사용근거를 생산하고 EDI 코드를 통한 의료정보 표준화에도 관여하고 있다.
박 교수는 “심평원은 국내에서 가장 신뢰받는 의료데이터 관리자이자 근거 기반으로 급여 여부를 판단하는 기관”이라며 “앞으로 심평원이 어떤 역할을 하느냐가 의료 AI 혁신과 건강보험 재정 안정, 의료의 질 향상을 좌우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AI 흐름에 끌려갈 것인지 함께 주도할 것인지 갈림길에 서 있다”며 “데이터를 보호하면서도 안전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