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시간 19.12.20 07:02최종 업데이트 19.12.20 0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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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 '생화학 50년'이 있기까지의 두 선생님

[칼럼] 배진건 배진(培進) 바이오사이언스 대표·우정바이오 신약클러스터 기술평가단장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메디게이트뉴스 배진건 칼럼니스트] 지난 9월 20일 오후 2시부터 연세대학교 백양누리에서 뜻 깊은 행사가 있었다. 생화학과(Biochemistry) 창립 50주년 기념행사가 ‘잇다, 다지다, 나아가다’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진행된 것이다.

이날 행사는 생화학과(학과장 송재환, 1987년 입학)가 주최하고 생화학과 동문회(회장 송석원, 1975년 입학)가 후원했으며, 동문과 재학생 450여 명이 참석했다. 개인적으로는 정말 많은 반가운 얼굴들을 한꺼번에 만난 의미 있는 행사였다.

생화학과는 1968년 문교부로부터 설립허가를 받고 1969년 3월부터 국내 최초로 강의를 시작했기에 1970년에 입학한 필자는 1974년에 마치고 2기 졸업생이 됐다.

생화학과는 지난 50년 동안 바이오 관련 학과 중에 유일하게 이름을 바꾸지 않은 학과로 바이오 관련학과 교수 배출 및 바이오벤처기업 창업 1위는 물론 국내 메이저 제약사 CEO와 연구소장을 석권하며 생명과학 및 제약-바이오업계 최고 인재산실로 인정받고 있다. 거기에 더해 생화학과를 졸업하고 의과대학으로 진학해 임상의학에 최고 전문성을 인정받는 조병철 교수 등 이런 의대 루트를 개척하신 분들도 상당히 많다.

1994년 9월 10일 생화학과 창립 25주년을 맞아 다양한 기념행사의 하나로 장기원기념관에서 가졌던 기념강연회에 재외국 연사로 초청받았던 필자는 50주년이 더 감명 깊었다. 당시 다른 두 분의 연사였던 성영철 제넥신 회장(8기)과 조영동 명예교수님도 이날 50주년에 참석하셔서 더 25년 전이 생각났다.

당시 학과장이셨던 1기 김두식 교수와 동문 회장이셨던 동기 노희태 학우의 수고가 기억난다. 당시 총장이셨던 고 송자 교수가 필자가 강의를 하기에 직접 축사를 해 주시며 꼭 여기에 와야 했던 이유를 밝혀 주신 기억도 다시 떠올랐다. 'My Way of Signal Transduction Pathways'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마친 후 생화학과의 첫 교수로 수고하셨던 고 주충노 교수님께서 "배 박사, 신약개발 현장 경험의 강의가 너무 좋았다"는 칭찬이 아직도 귀에 들렸다.

그 후로도 25년 지금의 신약개발전문가 '나'가 있기까지 생화학을 시작으로 내 인생의 길목을 바꿔 놓은 두 분 선생님의 얼굴이 그날 행사장에서 떠올랐다. 최재시 교수님과 정완호 선생님이시다. 

최재시 교수님은 1950년부터 40년간 화학과 교수로 재직해오다 90년에 정년 퇴임하시고 1998년 10월 28일 세브란스병원에서 별세했다. 청엄 최재시 교수는 이공대학장, 총무처장, 대학원장 등을 지냈으며, 1974년 자연과학 부문 학술상을 수상하셨다. 

이런 프로필보다 최 교수님이 대단하셨던 점은 이과대학장이셨던 1968년 이미 문교부로부터 생화학과 설립허가를 받고 1969년 3월부터 40명 학생들을 모집하셔서 겸직으로 초대 과장을 2년 동안 역임하신 것이다. 백방으로 교수를 찾으셨지만 주충노 교수님이 처음으로 부임하실 때까지 학과장을 겸직하셨다.

무엇보다 최 교수님은 화학과 교수로서 미래의 기반이 될 생화학과의 필요성을 충분히 아셔서 이런 동력을 가지고 이미 1968년 전부터 학과설립을 추진하셨던 분이다. 50주년 행사에서 최 교수님의 이름과 이런 공로가 언급이 안 된 것이 매우 아쉽다. 같은 테이블에 앉았던 1기 과대표였던 최병호 선배님과 2기 과대표였던 필자가 침튀기면서 이런 과거사를 다시 나눴다. 

또 한 분 정완호 선생님께서 나의 중·고등학교 생물 선생님이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마침 그분은 1966년 7월 서울중학교 생물교사로 오셨고 우리 동기가 중3에서 고등학교로 올라갈 때 같이 고등학교 교사로 올라갔으며, 3학년 4반의 담임 선생님이셨기에 지금도 우리 22회 동기와 매우 가까우시다.  

나 자신이 특출나게 잘 하는 것도 없고 특별한 특징도 없는 사람이기에 고등학교 2학년 때 문과/이과를 지망할 때 아버님이 바라시는 의대를 가기 위해 '이과'를 선택했다. 고 1때 농구와 노는 것을 즐겼기 때문에 이OO와 함께 처음 시험에서 꼴찌를 다툰 사람이기에 고3 때 서울대학이 전과목으로 입시규정이 바뀌었을 때 영·수·국이 중심인 연대의대를 가기로 마음먹었다. 

고3 때는 내 키를 살짝 줄여 전교 일등인 박동철 천재(충남대학교 전자공학과 명예교수)의 짝이 됐으므로 그를 따라 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런대로 매달 진행되는 모의고사 성적표 뒷장에서(서울대 안 가는 ~120명을 모아 놓은) 상당히 톱에 있었는데 안OO 만큼은 못 따라갔다. 워낙 안 박사도 의사가 될 사람이기 보다는 고전을 포함해 너무 책을 좋아하는 문학자가 되 적성이였기에 모의고사 '국어'에서 다른 사람의 배를 받으니 그를 따라잡기가 불가능했다. 모의고사 잘 치러도 내 이름은 그의 바로 밑에 있었다.

1970년 연대의대를 지망할 때 소위 '2차 지망'이 있었다. 무엇을 적어야 될까 고민하다 눈에 딱 뜨인 것이 '생화학과'였다. DNA 구조를 밝힌 왓슨과 크릭(Watson & Crick)은 물론 노벨상을 받은 오초아(Ochoa)의 이야기를 생물 선생이셨던 정완호 선생님으로부터 들었기 때문이다. 옐로우북(Yellow Book), 그린북, 불루북 등 영어로 쓰인 소위 원서 교과서를 가지고 앞으로의 생물이 '생화학'이란 이상한 것이 인도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생물시간에 많이 들었기에 정완호 선생님을 기억하며 '생화학'이라 적었다. 

합격자 발표 방이 붙었는데 내 이름은 찾아볼 수 없었고 이과대학 '생화학과'에 내 이름이 올라 있었다. 이렇게 나의 '생화학자' 커리어가 결정됐다. 지금까지 49년이 지났지만 한번도 내 자신이 과학자 타입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두 아들이 대학에서 비즈니스를 전공하고 아직도 금융계에서 일하는 것을 보면 아빠의 과학은 억지로 만들어진 과학자임을 알 수 있다.

그래도 나중에 교원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신 정완호 선생님 덕분에 생화학이 무엇인가를 어렴풋이 알고 2차 지망에 생화학을 적은 것이 내 첫 운명이었다. 또한 최재시 교수님 덕분에 이미 설립된 생화학과에 들어갈 수 있었다.

더구나 당시 과장님으로 의과대학 재수를 생각하던 필자에게 1학년 2학기부터 '인촌장학생'으로 추천해 주셔서 등록금 걱정하지 않고 전액장학생이 된 것도 운명이었다. 그랬기에 위스콘신에 공부하러 가서 'School of Pharmacy'에서 1982년 8월에 학위를 받아 생화학과 졸업생 중 첫 Ph. D.가 됐다. 

지난 50년 동안 생화학을 바탕으로 제약산업에서 아직도 왕성히 활동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게 만들어 주신 동산 정완호, 청암 최재시 선생님께 다시 감사를 드린다.


※칼럼은 칼럼니스트의 개인적인 의견이며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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