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격변기, 의료문제 개선 기회로..치밀한 작전과 신중함으로 의료계 단일 요구안 만들자"
[칼럼] 박인숙 울산의대 명예교수·전 국회의원
4.20 숭례문 앞 의료정상화를 위한 전국의사 궐기대회 장면.
[메디게이트뉴스] 지금 대한민국의 정치판은 난장판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의 혼란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정치적으로 큰 사건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터지는 바람에 의료붕괴 이슈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있는 형국이다. 도대체 삼권분립이 존재하는 나라인지도 의심스러운 상황까지 벌어지며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막장 드라마 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정치인들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발버둥치는 모습이 마치 통 안의 먹이를 놓지 않으려고 위험한 상황을 깨닫지 못하고 움켜 쥔 주먹을 빼지 못하는 탐욕스러운 원숭이의 덫 우화가 연상된다.
최근 두 거대 정당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를 보면 민주당은 ‘탄핵, 국힘당은 ‘배신’이라는 단어이다. 그래서 이러한 한심하기 짝이 없는 정치행태를 바라보는 국민은 정치에 대한 염증으로 머리가 아프다. 국회에서 압도적 숫자의 의원을 보유한 더불어민주당은 대선 후보에게 유리한 법안들을 빛의 속도로 통과시키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으며, 마음에 들지 않는 판사, 검사들을 모조리 탄핵하면서 민주공화국의 근본인 삼권분립 자체를 무너뜨릴 기세이다. 잘못하면 대한민국이 동아시아의 베네수엘라가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밀려온다.
이를 막아야 할 국힘당은 오히려 쓸만한 사람들은 모두 배신자로 낙인 찍어 제거해 버렸고 당 지도부라는 사람들은 정상적인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자해 행위를 반복하면서 당 자체가 자폭하는 중이다. 결국 양당 모두에 크게 기대할 것이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 현실에 절망한다. 이러한 양 정당의 만행을 바라보며 정신적인 스트레스와 트라우마, 나아가서 무기력함을 느끼는 것은 나 혼자만은 아닌 것 같다.
최근 거리를 다니다 보면 상점이나 식당들이 평소보다 한산해 보이고 아예 문을 닫은 곳도 많은것 같다. 산책을 하다 보면 나라 걱정을 하는 사람들의 대화를 엿들을 수 있다. 내가 너무 예민해서 내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지? 마치 폭풍전야 같다는 느낌조차 든다
정치권이 이리 엉망이고 나라 전체가 불안에 떨고 있는데 의료붕괴가 해결될 리 없다. 새삼 의대 2000명 증원이 국민들께 끼친 피해 목록을 상기해 본다. 수 천명(이제는 만명도 넘을 것 같다)의 초과사망이 있었고, 3만명이 넘는 학생과 젊은 의사들의 눈부신 미래 청사진이 깨졌고, 건강보험재정 포함 국민 세금만도 3조 4000억원 이상이 낭비됐고, 필수의료와 지역의료는 처절하게 망가졌고, 의료의 질 후퇴, 의학교육 붕괴, 병원, 제약 등 관련산업 붕괴, 국방의료 붕괴, 이공계 붕괴 등 이미 나타난 피해만도 엄청나다.
더 심각한 것은 이런 피해가 앞으로도 오랜 기간 회복하기 어렵다는 점인데 국민이 이런 상황을 아직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 생각이 이에 미치면서 이 모든 재앙의 원인 제공자인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분노가 새삼 다시 끓어오른다. 부디 새 정부가 국민 모두가 피해자인 이 엄청난 재앙을 촉발한 다수의 원흉들을 철저히 수사해서 엄중한 법 집행을 하기를 바란다.
이 사태가 시작된 지 일년 반이라는 시간이 지난 지금 이제는 아픈 사람들 이외에는 국민적 관심도 줄어서 언론도 강의에 출석하는 학생이 몇 명, 유급될 학생이 몇 명, 제적될 학생이 몇 명이라는 기사 정도만 내보내고 있다. 40개 의대학생 1만 9475명 중 42.8%가 유급(8305명) 또는 제적(46명) 예정이라고 교육부가 지난 9일 발표했다. 교육부와 대학 총장들은 학생들이 돌아오지 않으면 그 빈자리를 편입생들로 채울 것이라고 협박하고 있다. 병원에서는 전공의들의 빈 자리를 PA가 채우고 있고 교수들은 격무와 잦은 당직에 체력과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
누구에서나 삶의 동력은 미래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에 관해서는 아무리 둘러보아도 뚜렷한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그저 3주 후 새 정부가 들어서면 어찌 되겠지 라는 막연한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시간만 속절없이 흘러가고 있다. 사실 지금 진행 중인 의료대란과 의학교육 재앙은 당장의 피해도 크지만 향후 최소한 20년 이상에 걸쳐서 누적되며 나타날 부작용들은 훨씬 더 심각해서 두렵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불안감이 쌓이면서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공통되게 극도의 불안감과 무력감을 느끼고 있다. 학생들은 하루하루를 전전긍긍하며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고 사직 전공의들은 병원 및 개원가를 떠돌고 있다. 자포자기한 심정은 기성 의사들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지금 이런 힘든 상황을 꿋꿋이 버티고 있는 학생들의 결기가 참으로 가상하다고 생각한다. 나아가서 이들 덕분에 기성 의사들이 이제껏 해결하지 못한 의료개혁의 실마리를 풀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조심스럽게 가져본다.
작년 2월 6일 의대 2000명 증원 발표, 12월 3일 계엄령 선포, 4월 4일 윤석열 대통령 파면, 6월 3일 대선 등 쉴 틈 없이 터지는 정치적 사건들이 블랙홀처럼 의료재앙 이슈들을 빨아들이면서 의료계 목소리는 점차 묻혀버리는 것 같다. 현재 정치권의 모든 안테나는 대선에 맞춰져 있고 의료 이슈는 주요 결정권자들의 관심에서 멀어져가고 있다. 그래서 이제 3주 밖에 남지 않은 대선 이후 과연 어떠한 세상이 펼쳐질 것인지, 의료붕괴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모든 게 안개 속이다. 호랑이 피해가다 여우 만난다는 속담이 생각난다. 앞으로 전개될 정치 지형은 의료계에게 결코 우호적이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민심이 의사들에게 우호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6월 3일 이후 집권할 세력은 모처럼 맞이한 절호의 기회를 십분 활용해 의료제도 관련해서 자신들의 오랜 숙원사업의 신속한 해결에 속도를 낼 것이다. 의협이 민주당과 이재명후보와 정책협약식을 가졌다고 하는데 지금처럼 사방이 꽉 막힌 상황에서 이러한 노력은 분명 필요하다. 그러나 국민은 선거 후 공약이 지켜지지 않는 모습을 수없이 보아왔다. 조변석개(朝變夕改) 꼴이 나지 않을지 지켜보아야 한다. 민주당은 이미 공공의대 신설 등 의료계가 오랫동안 강하게 반대해 왔던 정책, 그 외에도 의료계를 옥죄는 여러 정책들을 주장하고 있는데 상황이 이렇다면 사직 전공의나 학생들이 돌아갈 명분을 찾는 것이 더 어려워질 수 있다.
한편 뒤집어 생각해보면 지금과 같은 사상 초유의 정치적 격변기가 어쩌면 오래 묵은 의료제도 문제를 개선할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새 정권에서 펼쳐질 상황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대응할지, 이에 대한 준비를 지금 마련해야 한다. 지금은 그럴 의무와 권한을 가진 의협, 병협 등 의사단체들, 의학교육협의회, 교수협의회, 의학회, 한림원, 전공의 단체, 학생 단체들이 머리를 모아서 단일 요구안을 만들어야 할 중요한 타이밍이다.
지금 이 모든 것이 비관적이고 역사가 후퇴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우리나라 현대사를 보면 역사는 한발 뒷걸음질하다가 두 발 앞으로 가는 식으로 천천히 그러나 조금씩 발전해 왔다. 우리민족은 잠재력이 뛰어난 우수한 민족임이 근래에 여러 분야에서 입증되고 있다. 의료도 전 세계에서 가장 단시일 내에 최고 수준으로 발전하였는데 유독 정치만 후진국 수준이다. 물론 의료 발전에는 의사들의 일방적인 희생이 그 밑거름이 돼서 가능한 일이었는데 이런 사실을 정치권과 국민만 모르는 것 같다. 어쨌든 이런 상황에서 정치가 조금만이라도 좋아진다면, 저출산과 인구감소가 향후 가장 무서운 걸림돌이지만 세계 1등 국가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보이는데 막상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정치는 최악이라 참으로 안타깝다. 그래도 희망을 찾는다면 위기는 기회라는 말처럼 환자들과 젊은 의사, 학생들의 희생을 딛고 지금의 총체적 난국을 극복한다면 미래에는 더 나은 의료시스템이 될 것이라고 기대해 본다. 지금 일부 의사들과 단체들이 미래 권력이라고 예상되는 정치권으로 달려가고 있는데 치밀한 작전과 신중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 대선 때 마다 남발하는, 대통령 후보 이름이 박힌 수백만장에 달하는 임명장에 현혹돼서도 안 된다. 훗날 지금의 의료 사태를 되돌아볼 때 나는 언제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었나, 특히 의사들의 리더 격인 사람들은 그때 자신이 했던 일을 당당하게 후배들에게 말할 수 있도록 지금 물 밑에서라도 움직여야 한다. 단 안전벨트는 꽉 매야 한다.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엄청난 롤러코스트에 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끝으로 학생들에게도 부탁한다. 자존심이 상하더라도 제적만은 피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윤석열 전 대통령과 이주호 교육부장관의 협박과 회유, 그리고 개인적인 공명심 때문에 의대 입학정원을 크게 늘린 대학의 총장들께 부탁한다. 내년 입시에서는 올해 증원된 1500명 숫자만큼 입학 정원을 줄여서 26년도에 교육받을 1학년 학생수가1만명이 넘지 않도록 조정해 줄 것을 부탁한다.
지금 우리 모두는 죽음의 계곡을 지나고 있는 중이다. 힘들어도 이 또한 지나갈 것이고 각자 지금의 위치에서 오늘 하루도 후회 없이 매순간 최선을 다하며 내일을 기약해본다. 영화대사 하나가 떠오른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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