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분쟁조정법 개정안 중대한 과실 조항 재검토 촉구…“결과 아닌 행위 당시 기준으로 판단해야”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메디게이트뉴스 박민식 기자] 대한소아청소년과학회가 의료분쟁조정법 개정안의 ‘중대한 과실’ 정의 조항에 대해 재검토를 촉구했다. 기준이 모호해 의료현장의 혼란과 소아 필수의료 위축을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다.
학회는 16일 성명서를 통해 “의료사고로 인한 환자 피해를 신속하고 공정하게 구제하고, 의료인의 과도한 형사적 부담을 완화해 안정적인 진료환경을 조성하고자 하는 입법 취지에 깊이 공감한다”면서도 개정안의 ‘중대한 과실’ 정의가 의료현장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최근 소아청소년과 진료와 관련한 일부 판결에서 소아진료의 특수성과 의료행위의 불확실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이번 개정안에 포함된 ‘중대한 과실’의 정의마저 의료현장의 현실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할 경우 소아 필수의료의 위축이 더욱 심화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학회는 “특히 이번 개정안에 포함된 일부 문언은 지나치게 포괄적이고 모호해 무엇이 ‘중대한 과실’에 해당하는지 명확하게 예측하기 어렵다”고 했다.
구체적으로 ▲환자나 수술 부위를 혼동해 수술한 경우 ▲수술 후 체내에 이물질을 남긴 경우 ▲혈액형이 맞지 않는 수혈을 한 경우는 중대한 과실로 볼 수 있지만, ▲예측 가능한 상황에서 필요한 진단이나 치료를 하지 않은 경우 ▲통상적인 진료 수준에서 현저히 벗어난 경우와 같은 표현은 해석의 여지가 지나치게 넓다는 점을 지적했다.
소아진료 특수성도 강조했다. 학회는 “소아 환자는 성인과 달리 자신의 증상을 정확히 설명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고, 진료 과정에서도 보호자의 설명에 의존해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며 “처음에는 가벼워 보이던 증상이 짧은 시간 안에 급격히 악화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이어 “검사와 처치 역시 아이의 협조 정도와 신체적 부담을 함께 고려해야 하므로, 성인과 같은 방식으로 곧바로 확정진단에 이르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며 “이러한 현실을 충분히 반영하지 않은 채 추상적인 기준을 일률적으로 적용한다면, 소아진료의 특수성과 임상적 판단의 어려움은 적절히 반영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결과 중심 판단에 대한 우려도 제기했다. 학회는 “이번 개정안은 환자에게 중대한 손상이나 사망과 같은 결과가 발생한 경우, 중대한 과실 판단이 결과 중심으로 이루어질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며 “의료는 본질적으로 불확실성과 위험을 수반하는 영역이며, 그 적정성은 결과가 아니라 행위 당시의 의학적 기준과 임상적 맥락에 따라 평가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결과 발생 이후의 사후적 관점에서 의료행위를 재구성하여 판단하게 되면 당시 확보 가능한 정보에 기초한 합리적 판단에도 결과를 이유로 과도하게 책임이 확대될 우려가 있다”고 덧붙였다.
이 같은 기준은 결국 방어진료와 필수의료 기피를 부를 수 있다는 지적이다.
학회는 “이와 같은 불명확한 규정은 의료현장에서 방어진료를 심화시키고, 소아·응급·중환자 진료와 같은 고위험 필수의료 분야에 대한 기피를 초래할 수 있다”며 “의료인은 적극적 진료보다 법적 분쟁의 회피를 우선하게 될 수 있으며, 이는 환자의 의료접근성 저하와 적시 진료의 지연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했다.
이어 “환자 보호와 의료인의 안정적 진료환경은 서로 대립하는 가치가 아니라, 함께 지켜져야 할 가치”라며 “특히 소아와 청소년이 필요한 시기에 적절한 진료를 받을 수 있는 체계가 반드시 보장돼야 한다”고 밝혔다.
이에 학회는 ‘중대한 과실’의 범위를 “객관적으로 확인 가능하고 사회적으로도 명백한 안전원칙 위반 행위”로 한정할 것을 요구했다. 특히 ‘예측 가능성’, ‘통상적 진료’, ‘안전관리 의무’ 등 추상적 문구의 삭제 또는 구체화를 촉구했다.
아울러 중대한 과실의 판단 기준은 “결과가 아니라 행위 당시의 의학적 판단 기준, 즉 동일 전문과목과 유사한 진료환경에서의 사전적 기준”에 따라야 한다고 밝혔다. 또 소아∙응급∙중증 등 필수의료 분야의 특수성이 입법 과정에 반드시 반영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학회는 끝으로 “소아진료 현장의 위축은 결국 소아, 청소년과 가족의 불안과 부담으로 돌아가며, 우리 사회 전체의 소아 필수의료 기반을 흔들 수 있다”며 “이번 개정안의 ‘중대한 과실’ 정의 조항에 대하여 신중한 재검토와 함께 충분한 보완을 강력히 촉구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