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게이트뉴스] 도쿄역에서 JR 게이요선을 타고 가이힌마쿠하리역에 내려 바닷바람을 맞으며 걸으면 마쿠하리멧세의 거대한 전시홀이 나타난다. 10월 7일 오전 10시, 문이 열리자 목에 출입증을 건 병원·의료 관계자들이 홀 안으로 들어갔다.
‘제9회 메디컬 재팬 도쿄 2026’은 10월 7일부터 9일까지 사흘간 열렸다. 모두 7개 전문 전시회로 구성됐다. 병원 EXPO, 클리닉 EXPO, 장기요양·복지 EXPO, 차세대 약국 EXPO, 건강증진 EXPO(구 미병·예방·건강 EXPO), 의료DX EXPO, 그리고 올해 처음 열린 건강검진·인간도크 EXPO다.
주최는 RX 재팬이다. 일본병원회, 일본개호협회, 약국DX추진컨소시엄, 일본인간도크·예방의료학회, 일본인간도크건진협회가 공동 주최기관으로 참여했다. 후생노동성과 전일본병원협회, 일본의사회 등 약 100개 기관·단체가 후원했다.
주최 측이 제시한 규모는 출전 기업 약 650개사, 예상 방문객 1만7000명, 세미나 약 60개 강연이었다. 사흘 동안 전시장 곳곳을 걸었다. 우리보다 먼저 초고령사회와 생산연령인구 감소를 경험하고 있는 일본 병원계가 지금 무엇에 투자하고 무엇을 고민하는지 확인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전시장을 관통한 키워드는 ‘첨단’이라기보다 ‘생존’에 가까웠다.
전시장을 걷다: 사람의 일을 덜어주는 기계들
의료DX 구역은 관람객의 관심이 특히 높은 공간 가운데 하나였다. 의사와 환자의 대화를 생성형 AI가 듣고 진료기록 작성을 지원하거나, 각종 문서 작성 업무를 줄여주는 시스템이 소개됐다. 병원 내 물품 운반과 반복 업무를 대신하는 로봇과 자동화 시스템도 눈에 띄었다.
기술의 방향은 분명했다. 새로운 기능을 보여주는 것 자체보다 의료진과 직원이 반복적으로 수행하던 일을 얼마나 줄일 수 있느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자동정산기·POS 단말기 특별관’도 별도의 기획 공간으로 마련됐다. 병원과 클리닉, 약국에서 사용할 수 있는 자동정산기와 POS 시스템을 한자리에서 비교할 수 있도록 마련한 공간이다. 제품마다 기능에는 차이가 있었지만 핵심 메시지는 비슷했다. 접수와 수납에 드는 시간을 줄이고 직원의 업무 부담을 낮추겠다는 것이다.
차세대 약국 체험 구역에서는 조제업무의 효율화와 약국 DX의 미래를 보여주는 여러 시스템이 소개됐다. 특히 조제업무 일부를 다른 약국에 위탁하는 제도를 염두에 둔 업무 흐름과 시스템 연계가 관심을 끌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서 볼 대목이 있다. 일본은 2025년 의약품의료기기법 개정을 통해 일정한 조제업무의 외부위탁을 제도화했지만, 관련 제도의 전국 시행은 2027년 5월 20일로 예정돼 있다. 현재는 국가전략특구에서의 실증 경험과 제도 시행 준비를 바탕으로 실제 운영 모델을 구체화하는 단계다. 전시장에서 본 것은 이미 전국적으로 정착한 제도라기보다 가까운 미래의 약국 운영 방식을 미리 보여주는 장면에 가까웠다.
장기요양·복지 분야에서도 방향은 같았다. 스마트글라스와 AI 모니터링, 각종 돌봄 지원기기 등은 적은 인력으로 현장을 유지하기 위한 기술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올해 처음 열린 ‘건강검진·인간도크 EXPO’도 눈길을 끌었다. 일본의 2024년도 특정건강검진 수검률은 61.5%로 제도 도입 이후 처음으로 60%를 넘어섰다. 그러나 대상자 약 5142만 명 가운데 약 1980만 명은 여전히 검진을 받지 않았다. 검진기관 역시 인력 부족과 업무 부담을 안고 있어 검진 DX와 업무 효율화가 새로운 시장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개인보호구 체험·전시 구역에서는 의료용 장갑과 가운 등 의료소모품을 직접 비교할 수 있었다. 의료기관과 운동·건강관리 서비스를 연결하는 메디컬 피트니스 관련 상담 공간도 마련됐다.
한국 기업들도 눈에 띄었다. 클리닉 EXPO의 미용의료·자유진료 분야 등에서 한국 제품과 기업을 만날 수 있었다. 일본 의료시장에서 미용의료와 자유진료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흐름은 한국 의료기기·헬스케어 기업에도 새로운 시장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세미나장: 일본 병원 단체 수장들이 직접 마이크를 잡다
전시장 한편의 세미나 홀에서는 사흘 동안 다양한 강연이 이어졌다. 무엇보다 일본 병원계를 대표하는 주요 단체의 수장들이 직접 연단에 섰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아이자와 다카오 일본병원회 회장은 미래 병원의 방향을 주제로 강연했다. 진노 마사히로 전일본병원협회 회장은 의료DX와 지역의료를 주제로 강연했다. 교토대학교 의학부 부속병원 의료정보기획부의 구로다 도모히로 교수는 의료DX를 다뤘다. 여러 실무 전문가와 기업 관계자들은 생성형 AI와 병원 업무혁신 사례를 소개했다.
병원 단체의 수장이 산업 전시회 무대에 직접 올라 병원의 미래와 디지털 전환을 논의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메시지로 다가왔다. 일본 병원계에서 DX는 더 이상 IT 부서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병원 경영과 지역의료의 지속 가능성을 좌우하는 의제로 올라와 있었다.
둘째 날인 8일 낮에는 CB뉴스가 주최한 ‘병원DX어워드 2027’ 프리이벤트가 열렸다. 병원DX어워드 행사가 도쿄 지역에서 열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주제도 흥미로웠다. ‘AI 병원은 도래하는가’와 ‘표준형 전자의무기록 이후 병원의 모습’이었다. 심사위원을 맡은 병원 경영자와 전문가들이 병원 DX의 미래를 논의했고, 2026년 병원DX어워드 대상·우수상 수상 기업 5곳도 도입 사례와 성과를 소개했다.
병원DX어워드가 지향하는 방향 역시 눈여겨볼 만했다. 단순히 신기한 기술을 뽑는 데 그치지 않는다. 병원의 실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 의료현장에서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지, 도입 이후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지를 중시한다. 기술 공급자와 병원 현장을 연결하고, 병원이 필요로 하는 DX의 기준을 만들어 가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현장에서 본 것, 일본의 정책에서 다시 확인하다
전시장을 걷는 내내 한 가지 질문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사람이 줄어들면 병원과 돌봄 현장은 무엇으로 버틸 것인가.’
이 질문은 일본 정부가 이미 오래전부터 고민해 온 문제이기도 하다. 후생노동성은 2040년을 전망하면서 고령인구 증가로 의료·복지 수요는 이어지는 반면, 이를 담당할 현역세대는 크게 감소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정책 목표 가운데 하나로 ‘보다 적은 인력으로도 운영할 수 있는 의료·복지 현장’을 제시하고 있다.
장기요양 분야의 숫자는 더욱 직접적이다. 후생노동성 추계에 따르면 일본의 돌봄직원은 2022년도 약 215만 명에서 2040년도 약 272만 명으로 늘어날 필요가 있다. 지금보다 약 57만 명을 추가로 확보해야 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생산연령인구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필요한 인력을 모두 사람으로 충원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결국 인력 확보와 동시에 업무의 자동화, 생산성 향상, 직종 간 업무 재설계가 필요하다. 전시장에서 본 AI, 자동정산기, 물류 시스템, 조제 지원기기와 돌봄 기술이 단순한 신제품으로 보이지 않았던 이유다.
건강검진 전시회의 신설도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특정건강검진 수검률은 처음으로 60%를 넘어섰지만 약 1980만 명이 여전히 미수검 상태다. 검진 수요를 확대하면서도 부족한 인력으로 더 많은 사람을 받아야 한다면, 예약·문진·판정·결과통보 등 검진 과정 전반의 DX가 필요해진다.
일본 정부의 의료DX 정책도 이 방향과 맞닿아 있다. 일본은 의료DX 추진체계 정비, 표준형 전자의무기록 개발, 진료수가 개정 DX, 공통산정모듈 도입 등을 추진하고 있다. 이를 통해 의료기관과 시스템 업체의 행정부담과 시스템 개편 비용을 줄이려는 것이다.
다만 이를 ‘DX를 하면 곧바로 진료수가로 보상한다’고 단순화해서는 안 된다. 일본의 특징은 진료수가상의 각종 평가와 정책지원, 시스템 표준화, 보조사업 등을 함께 활용해 의료기관의 디지털 전환을 유도하고 있다는 데 있다.
마쿠하리에서 본 전시장의 열기는 이런 제도적 변화와 심각한 인력 부족, 병원 경영 악화가 동시에 만들어낸 결과라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우리 병원계가 읽어야 할 네 가지 신호
1. DX는 제도적 지원과 연결될 때 확산된다.
병원에 디지털 전환을 요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초기 투자비와 유지비, 보안비용이 들고 업무 프로세스 자체를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일본은 의료DX 정책과 표준화, 진료수가상의 평가, 각종 지원책을 병행하고 있다.
우리도 AI와 디지털 기술을 도입해 실제로 업무량을 줄이고 생산성을 높인 병원에 어떤 인센티브를 줄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투자만 요구하고 성과를 제도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구조에서는 확산에 한계가 있다.
2. ‘작은 솔루션’이 현장을 바꾼다.
전시장에서 관심을 끈 것은 거대한 첨단 의료장비만이 아니었다. 수납, 문서 작성, 물품 운반, 약제 분류와 검수처럼 직원이 매일 반복하는 일을 줄여주는 도구들이었다.
특히 인력난이 심한 중소병원에는 이런 기술이 더 절실할 수 있다. 개별 병원이 모든 제품의 성능과 보안, 경제성을 판단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병원 단체가 공동 검증, 표준사양 마련, 공동구매와 보안 지원 등의 플랫폼 역할을 맡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3. 병원 단체가 DX 의제를 주도해야 한다.
일본병원회와 전일본병원협회 등 주요 병원 단체의 회장이 직접 산업 전시회 연단에 올라 미래 병원과 의료DX를 논의했다. 산업계와 언론이 참여하는 병원DX어워드 역시 병원 현장에 적합한 기술을 발굴하고 확산시키려는 장치다.
중요한 것은 병원이 기술의 단순한 소비자에 머물지 않는 것이다. 어떤 기술이 필요한지, 어떤 기준으로 평가할지, 실제 병원에서 어떻게 적용할지를 병원계가 주도해야 한다. 국내 병원 관련 전시회와 학술대회 역시 병원의 실제 과제와 기업의 해법을 연결하는 실증·매칭·평가 기능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4. 한·일 병원계는 점점 비슷한 숙제를 안게 된다.
생산연령인구 감소, 의료인력 확보의 어려움, 고령환자 증가, 지역의료 유지 문제는 한국과 일본이 함께 마주하고 있는 과제다. 정도와 시기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일본이 먼저 겪은 시행착오를 살펴볼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병원 단체 간 정책 경험과 현장 사례를 정례적으로 공유할 필요가 있다. 의료DX와 인력 효율화, 지역의료, 병원 경영 등에 관한 공동 논의 채널도 넓혀야 한다. 동시에 일본 의료·헬스케어 시장의 변화는 경쟁력 있는 한국 기업들에게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
돌아오는 길에
마지막 날 오후, 부스들이 하나둘 짐을 꾸리기 시작한 전시장을 뒤로하고 가이힌마쿠하리역으로 걸었다.
사흘 동안 본 것은 단순히 반짝이는 신기술이 아니었다. 사람이 줄어드는 시대에도 병원과 의료·돌봄 현장의 문을 계속 열어두기 위해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에 대한 준비였다. 절박하지만 현실적인 준비였다.
일본 병원계는 인력난을 더 이상 일시적인 현상으로 보지 않는 듯했다. 정부는 제도와 정책으로, 기업은 기술과 제품으로 대응책을 찾고 있었다. 병원과 관련 단체는 현장의 문제를 의제로 만들고 있었다.
한국도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 어쩌면 변화의 속도는 일본보다 더 빠를 수 있다.
마쿠하리에서 확인한 것은 ‘어떤 첨단기술을 도입할 것인가’라는 질문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이었다.
사람이 줄어드는 시대에 병원을 어떻게 지속 가능하게 만들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정부나 기업에만 맡길 수는 없다. 현장을 가장 잘 아는 병원계가 필요한 기술과 제도의 방향을 먼저 제시해야 한다. 그것이 이번 메디컬 재팬 도쿄에서 가져온 가장 큰 숙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