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시간 21.12.12 14:46최종 업데이트 21.12.12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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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의 지원 기피 현상과 정부의 필수의료 살리기 '엇박자'

[칼럼] 안덕선 전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장·세계의학교육연합회 부회장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메디게이트뉴스] ‘Road to the Happiness!’라는 구호는 미국에서 전공의 지원 현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ROAD는 Radiology, Ophthalmology, Anesthesia, Dermatology의 4개 임상과 영어단어 첫 글자 조합인데 우리말로 ‘행복의 길’이 됐다. 의사로서 행복한 삶을 사는 길은 곧 영상의학과, 안과, 마취통증의학과, 피부과의 4개 전문과목임을 시사한다. 현대의 의료 환경에서 의과대학생이 희망하는 전공과목은 자신의 삶과 일, 그리고 가족에 대한 균형을 염두에 두고 있다. 물론 희망하는 전문진료과에 대한 일의 양도 중요한 요소다.

의과대학생이 선호하는 전문과목(preferred specialty)과 그 이유를 탐색하는 학술적 자료는 여러 나라에서 출간해 상당히 많은 자료가 존재하는데 우리와 같이 ‘기피과(deferred specialty)’라는 용어가 사용된 논문은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기피과라는 용어 대신 ‘낮은 인기도’라는 표현이 간혹 눈에 들어온다. 비인기과와 기피과는 엄밀히 보면 별개의 개념인데 특히, 기피과라는 이름은 너무나 부정적인 함의를 포함하고 있어 사용하지 말아야 할 단어처럼 여겨진다.

의업이 고귀하고 윤리적인 것이라면 전문과목이 기피 대상이라는 사실은 의사의 전문직업성에 대한 전통적 정의와 배치되기 때문이다. 비록 미국은 ‘행복의 길’로 인도하는 4개 과가 존재하지만, 전통적인 기본과는 기피과가 되지 않는다. 내과와 외과 계열은 1년 차에 대한 근무 강도가 다른 과에 비해 높은 것도 사실이나 그렇다고 기피과는 아닌 것이다. 그리고 미국에 가고 싶어 하는 의사들도 전 세계에 높게 분포하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정부가 꿈꾸는 필수의료정책 뿌리는 썩는데 좋은 열매 기대하는 바보들 상상에 불과  

한 나라에서 인기과에 대한 순위나 의과대학생의 전공과목 선택 경향을 파악하는 것은 시대적 변화를 추적하는 의미보다는 의료인력 정책에 대한 기본정보를 제공하기에 매우 중요한 척도로 간주된다. 전임 보건복지부 장관은 2018년에 생명과 직결된 필수의료 서비스를 강화하기 위해 권역 및 지역별 책임의료기관 지정을 추진하고 각 지방자치단체와 함께 필수의료 협력체계를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필수의료에 대한 개념은 절대적 정의는 아니지만 복지부는 응급·외상·심뇌혈관 등 중증의료, 산모·신생아·어린이 의료에 더불어 재활, 지역사회 건강관리(만성질환, 정신, 장애인), 감염 및 환자안전 등으로 그 범주를 정했다.

정부가 주도하는 필수의료가 성공하려면 우선 중증의료를 취급할 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청소년과의 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이런 임상과가 어찌된 이유인지 기피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의사 인력구조는 정부의 의지대로 필수의료체계가 구축될지 회의적인 시각이 앞선다.

아울러 정부는 필수의료의 효과적 제공을 위해 17개 권역(시도)과 70개 지역(중진료권) 중에서, 2020년에는 14개 권역과 15개 지역부터 국립대병원과 지방의료원을 책임의료기관으로 지정하고 그 책임의료기관은 권역과 지역 내 정부지정센터(응급·외상·심뇌혈관질환센터 등), 지역보건의료기관 등과 필수의료 협의체를 구성하고 퇴원환자 연계, 중증응급질환 진료협력 등 필수의료 협력모형을 만든다는 그럴듯한 계획도 공개했다. 그러나 중증의료를 담당할 미래의 전문 인력을 양성하지 못하는 처지에 필수의료를 위한 필수인력은 어디에서 구할지 자못 궁금하다. 정작 정부의 야심찬 정책 달성에 필요한 최소 인력산정에 대한 요구분석 자료나 필수인력 추계자료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현 정권은 공공의료를 강화한다면서 정작 인력양성은 전적으로 민간병원에 의존한다. 인력양성이라는 사회적 자산에 대한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선진국에서 의료공공성의 확보에는 우선 인력양성의 공공성이 우선해 병원 수익 창출에 의한 전공의 급여지급을 하지 않는다. 현 정권이나 그동안의 정부 정책에서는 공공성 강화를 위한 의료인 양성에 대한 공공성 인식은 해방 이후 현재까지 별로 변한 것이 없어 보인다. 가난한 시절 손 안 대고 코 푸는 전문의제도 도입으로 의료기술의 선진화는 공짜로 달성한 셈인데, 이런 제도로는 정작 사회적 수요에 의한 전공의 인원조정이나 배치는 불가능해 보인다.

그럼에도 정치적 구호에 탁월한 역량을 보이는 현 정권은 “공공의료를 강화해 필수의료 서비스에 대한 지역격차를 없애거나, 꼭 필요한 병원 진료를 가까운 주거 지역에서 편리하게 받도록 한다!”라는 감동적인 구호로 그 사정을 잘 모르는 국민에게 착한 정부 이미지 형성과 국민적 지지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 이제 대통령 임기가 다 돼가는 시점에 과연 이런 구호는 실제로 얼마나 실현되고 있는가를 보면 감동적인 구호가 아닌 한낱 허공 속의 메아리로만 들린다.  

필수 영역 기피현상 오래전 예견된 일, 자긍심 적절한 보상 뒤따라야 회생가능

개발도상국, 중진국 등 여러 나라에서 출간된 의과대학생의 희망 전문과목 선호도 연구논문에서 여전히 내과, 외과 등 필수의료 담당과에 대한 변함없는 인기를 확인할 수 있다. 영국, 캐나다, 미국 등 영어권의 선진 국가도 여전히 가장 기본적인 전문과목인 내과, 외과에 대한 지원자는 꾸준히 유지되고 있다. 최근 독일의 의과대학생을 대상으로 조사한 논문을 보아도 전공의 지망에 대한 보편적 현상은 그대로 보여준다. 중증의료를 담당할 기본 임상과에 대한 학생의 선호도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필수 의료과를 기피하게 만든 이유는 무엇인가? 중증환자는 생명이 위태로운 위기 상황에 있고 이를 담당하는 의사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 통상적인 모습이다. 이제 우리나라는 국민소득 4만달러의 경제적 선진국이 됐다. 그러나 우리 의료 환경은 의료로 인한 환자의 사망이나 장애가 불가항력적인 상황을 고려하지 않거나 혹은 임상적 판단의 오류를 범했다는 이유로 의사를 인신구속하고 형사적 처벌을 쉽게 가하고 있다. 이러한 후진적 의료 환경은 의과대학생들로 하여금 필수과에 대한 기피현상을 유도하는데 크게 한몫하고 있다.

중증의료는 환자나 의사에게 고난이도, 고위험도, 그리고 심리적 고부담의 상황에 노출하도록 한다. 어렵고 힘든 직무에 대한 보상이 국민소득의 성장과는 시대착오적인 초저수가를 유지하고 있어 의사에게 힘든 일에 대한 자부심보다는 오히려 괴리감과 좌절감만 키워주고 있다. 한마디로 우리 의료 환경이 정의롭다거나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기피과에 대한 수련기간 단축, 혹은 전공의 급여를 높게 책정하는 것은 매우 근시안적이고 임시방편적인 정책이다. 기피과 문제는 소수의 전공의가 감당해야 할 엄청난 일을 해야 한다는 근무환경에 쉽게 압도당해 결국 중도 포기도 많을 수밖에 없어 보인다. 유럽연합의 전공의 근무시간 책정은 주당 45시간이고 당직 등 다른 직무 시간을 포함해도 50시간 정도 근무하도록 한다. 특히, 이들에게는 연간 4주의 휴가와 육아휴가, 학술 활동 등 다양한 배려 정책이 확보돼 있다.

필수의료가 기피 대상이 된 이유는 생명을 다루는 고위험, 고부담 진료로 형사범이 될 개연성이 높고, 힘들고 복잡한 근로에 대한 정당한 보상과 대우 없이 막무가내로 낮은 가치산정을 방치한 데 따른 것이다. 마치 후진국형 독재 시대의 의료정책과도 같은 불행한 산물이다. 우리나라의 의료제도를 벤치마킹해 의료문화의 동질성을 보이는 타이완도 기피과에 대한 동일한 현상이 존재한다. 

필수의료 기피과 문제 해결은 필수의료의 사회적 수요를 근거로 한 인력양성은 전공의 교육에 대한 공공의 자산투입과 근거를 바탕으로 산정되는 투명한 전공의 인력 추계와 조절이 동반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물론 이를 위한 전공의 교육의 거버넌스(治理) 현대화도 동시에 갖춰져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의료노동에 대한 가치산정이 직무의 투입자산, 난이도, 위험도에 비례해 조화롭게 이뤄져야 한다. 
 

※칼럼은 칼럼니스트의 개인적인 의견이며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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