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초 사상 최저치까지 떨어지며 디폴트 위기
원유 등 러 원자재 수요 유지되자 금세 회복
"경상수지 흑자는 루블화 안정의 원천"
블룸버그, 올해 러 에너지 수출 3210억弗 전망

[아시아경제 김현정 기자, 정현진 기자] 서방의 잇단 경제 제재에도 불구하고 달러 대비 루블화 환율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전 수준으로 돌아가며 가치를 회복했다. 러시아의 내부 외화 유출 통제가 힘을 발휘하고 원유와 천연가스 등 러시아산 원자재 수요도 유지되면서, 러시아를 고립시키려는 서방의 시도를 무력화시키고 있다는 분석이다.
7일(현지시간) 블룸버그 통신에 따르면 이날 모스크바 외환시장에서 루블화 환율은 달러당 75.75루블을 기록, 루블화 가치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전 수준을 웃돌았다.
◆제재 압도하는 에너지의 힘= 지난달까지만 해도 러시아의 디폴트(채무불이행) 사태를 전망하던 서방은 루블화 가치의 급락과 회복 불능을 예견했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제재 발표 뒤 루블화(Ruble)를 ‘잔해(Rubble)’라고 조롱하기도 했다. 실제로 침공 직전인 21일 기준 달러당 80루블 수준에서 거래되던 루블화 가치는 미국과 유럽연합(EU)의 경제 제재 발표 후인 지난달 초 121.5루블까지 폭락하며 사상 최저치를 기록한 바 있다.
그러나 루블화는 꾸준한 러시아산 원유와 천연가스 수요를 기반으로 빠르게 가치를 회복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러시아는 올해 에너지 수출로 3210억달러(약 392조4225억원)를 벌어들일 것으로 전망되는데, 이는 지난해(2356억달러)보다 오히려 36% 이상 증가한 수치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세계가 분노하고 종전 압박을 거두고 있지만, 통화 측면에서는 러시아가 ‘큰 승리’를 거둔 것이라고 통신은 분석했다. 웰스파고 증권의 브렌던 매케나 전략가는 "경상수지 흑자는 루블화 안정의 원천이 된다"면서 "높은 가격을 유지하는 에너지와 원자재 수요가 계속된다면, 경상수지 흑자가 유지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프랑스 최대 보험사 제네랄리의 신흥시장 선임 전략가인 기욤 트레스카는 "제재가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야말로 정치적으로 가장 훌륭한 홍보수단"이라고 평가했다.
러시아가 기업들이 보유한 외화의 80%를 루블화로 전환토록 하고, 외국인투자자들의 주식 매도를 막는 등 환율 통제 시도가 먹혀들었던 측면도 있다. 러시아의 현재 통화 거래량은 10년 만에 최저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강압적인 통화정책에 따른 루블화 가치 회복이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재닛 옐런 미국 재무장관 역시 지난 6일 "루블화 반등에서 어떠한 결론을 내리지 말라"고 촉구했다.

◆美, 에너지 수입 금지 법안 통과= 이른바 ‘부차 대학살’ 이후 서방은 러시아에 대한 제재를 이어가고 있으나 치명타를 날리기엔 역부족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미국은 이날 의회에서 러시아에 대한 무역상 특혜인 ‘최혜국대우’ 적용 폐지와 러시아산 에너지 수입을 금지하는 법안이 통과됐다. 이미 지난달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이 행정명령을 통해 실행 중이거나 실행 방침을 밝힌 법안을 의회 차원에서 공식 입법 절차를 진행한 것으로 상·하원의 압도적인 찬성표를 받았다.
이 법안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와 러시아를 도운 벨라루스에 대해 ‘항구적 정상 무역 관계(PNTR)’에 따른 최혜국 대우를 박탈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최혜국대우가 박탈되면 러시아산 제품과 벨라루스산 제품에 높은 관세를 부과할 수 있게 된다. 현재는 평균 2.8% 수준인 관세가 20% 수준으로 올라갈 것이라고 전문가는 전망했다.
척 슈머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는 "군이 전쟁범죄를 저지르는 국가는 미국과 자유무역을 할 자격이 없다"면서 "푸틴과 같은 부도덕한 깡패는 다른 자유국가 정상들과 동등한 위치에 서 있을 자격이 없다"고 비난했다.
러시아 에너지 의존도를 감안해 에너지 제재를 미뤄왔던 유럽연합(EU)도 이날 뒤늦게 러시아산 석탄 수입을 금지하기로 합의했다. 유럽이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산 에너지에 대해 제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EU 회원국 대표들이 합의한 데 이어 미국, 영국과도 합의했으며 이의제기 신청 기간을 거쳐 8일 최종 확정될 예정이다.
다만 이번 조치는 곧바로 시행되는 것이 아니라 4개월간의 유예를 거쳐 8월부터 시행될 것으로 보인다. 독일을 비롯한 유럽 주요국이 러시아 에너지 의존도가 높은 만큼 당장 금수조치를 시행할 경우 타격이 예상돼 유예기간을 두기로 했기 때문이다.
EU 회원국들은 석탄에 이어 러시아 석유, 천연가스 수입 금지 방안에 대해서도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이견이 큰 것으로 전해졌다. AP통신은 러시아 석탄 수입 금지는 EU 회원국에 석유, 천연가스 금지에 비해 쉬운 선택지로 평가된다고 전했다.
김현정 기자 alphag@asiae.co.kr
정현진 기자 jhj48@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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