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종=아시아경제 권해영 기자] 2019년 일본발(發) 소재부품장비 수출규제가 국내 관련 산업 자립화를 앞당겼지만 정작 중국 의존도는 오히려 높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가 일본의 소부장 수출제한조치가 '백신'이 됐다고 자화자찬하고 있지만, 다른 한쪽에선 오히려 중국 리스크를 키우고 있던 것이다. 요소수로 인한 '공급망 차이나 리스크'가 불거진 만큼 우리 제조업의 근간인 소부장 분야에서 대중 의존도를 낮춰야 한다는 요구가 커질 전망이다. 특히 미·중 갈등 고조로 이 같은 공급망 중국 쏠림 현상이 우리 경제에 직간접적으로 타격을 미치기 시작한 만큼, 공급망 다변화는 물론 미국과 우방국이 주도하는 공급망 재편 움직임에 적극 동참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극일' 소부장, 대중 의존도 오히려 증가=11일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소부장 전체 수입액 1975억달러 중 대중 수입액은 541억달러로 27.4% 비중을 차지했다. 2012년 24.9% 대비 2.6%포인트 증가한 수준이다. 같은 기간 소부장 수입액 가운데 일본이 차지하는 비중은 23.8%에서 17.2%로 줄었지만, 중국에 대한 의존도는 오히려 늘어난 것이다. 대중 무역수지 또한 2012년 519억달러 흑자에서 2020년 364억달러 흑자로 흑자폭이 줄었다.
이는 중국의 소부장 산업 경쟁력이 금속·금속가공제품, 전기장비·전자부품, 일반기계 부품·장비 등 많은 분야에 걸쳐 개선되며 격차가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높은 가격 경쟁력 또한 중국 소부장 수입을 늘리는 주요 요인이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에 따르면 중국에서 소부장을 수입하는 이유로는 가격 경쟁력(77.2%) 비중이 가장 높았고, 다음으로 국내 미생산(18.6%)이 차지했다.
그동안 중국 소부장 의존도 증가는 높은 기술력 보다는 가격 경쟁력에 기반한 것인 만큼 크게 우려할 만한 일이 아니란 시각이 많았다. 그러나 이번 요소수 부족 사태처럼 핵심물품 뿐 아니라 범용물품까지 공급 부족에 시달릴 수 있고 그 여파가 일파만파 확산될 수 있다는 점에서 과도한 대중 의존도를 낮춰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배터리 소재, 의약품 원료 등 국내 주력 산업에 필수적인 원자재의 중국 의존도 역시 지나치게 높다. 배터리 주요 원자재의 경우 우리의 대중 수입 의존도는 수산화리튬 81.1%, 산화코발트 87.3%, 황산망간 100%에 달한다. 중국이 수출제한조치를 취할 경우 우리 기업의 배터리 생산 공장이 언제든 문을 닫을 수 있는 상황이다.
◆공급망 재편…'안보' 고려 불가피=일각에선 전 세계적으로 공급망 재편 작업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지만 정작 우리 정부는 소부장 극일에만 매달려 공급망 안정화엔 손을 놓고 있었다고 비판한다. 더욱이 미중 갈등으로 글로벌 공급망이 중국을 배제하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고, 공급망 재편이 '비용→가치' 중심으로 이동하는데 우리는 안이한 상황 인식과 경제적 비용 문제 등으로 중국 의존도만 높여왔다는 지적이다.
미국이 글로벌 공급망 재편 작업에 속도를 낼 경우 제2, 제3의 요소수 사태는 언제든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중국이 자국 의존도가 높은 한국을 상대로 주요 원자재를 전략 무기화 할 가능성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 요소수 품귀 사태도 미중 갈등에서 비롯됐다. 호주가 미국의 화웨이 제재에 동참하면서 중국과 외교적 갈등을 빚었고 대중 석탄 수출 제한, 중국의 요소 수출 금지 조치로 이어진 것이다. 이번엔 중국 내부 공급난으로 한국 수출 제한으로 이어졌지만, 향후 중국을 배제하는 형태의 미국 공급망 재편 작업에 동참할 경우 중국이 의도적으로 한국에 원자재 수출을 막을 수 있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중국에만 의존하는 공급망 구조를 다변화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강천구 인하대 에너지자원공학과 초빙교수는 "주요 품목은 경제성이 다소 떨어지더라도 정부가 지원해 자체 생산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중국, 일본 등 특정국가에 의존하는 시스템에서 탈피해 수입처를 다변화할 수 있는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조언했다.
안보 차원에서 미국 중심의 글로벌 공급망 재편 작업에 적극 동참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미국과 동맹국의 국내총생산(GDP) 합계는 전 세계 GDP의 65.8%에 달한다. 현재 방한중인 대니얼 크리튼브링크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차관보가 산업정책을 총괄하는 산업부에 이례적으로 면담을 요청한 것만 봐도 미국이 공급망 문제를 '안보' 문제로 인식하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첨단기술을 중심으로 중국을 배제하려는 미국의 움직임이 가속화 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이태규 한국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미국은 자국 산업육성과 보호를 위한 과감한 산업정책 도입을 추진하는 동시에 이해가 일치하는 동맹국 간의 신속한 협의로 중국을 견제할 것"이라며 "미국과 협력하면서 미국 정부의 지원을 끌어내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권해영 기자 roguehy@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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