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우병 치료 '예방 중심' 패러다임 전환…"약제 사용 제한·부양의무자 기준 등 개선 필요"
개인 중증도·출혈 양상·생활 환경 등 고려한 환자 맞춤 치료 접근 필요…정부 "본인부담 완화·신속 등재 추진"
8일 국회에서 '혈우병 환자 건강권 보장을 위한 건강보험제도 개선 정책 토론회'가 개최됐다.
[메디게이트뉴스 이지원 기자] 혈우병 환자가 치료비 부담과 약제 사용 제한으로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면서 장애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이에 의료 전문가와 환자단체는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와 함께 예방 중심 치료를 위한 충분한 약제 사용 보장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8일 국회에서 열린 '혈우병 환자 건강권 보장을 위한 건강보험제도 개선 정책 토론회'에서는 혈우병 환자의 치료 한계와 제도 개선 필요성에 대한 논의가 진행됐다.
혈우병은 혈액 응고에 필수적인 특정 응고인자가 선천적으로 결핍돼 발생하는 유전성 희귀질환으로, 국내 약 2300명이 앓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혈우병은 응고인자 결핍 정도에 따라 중증도가 달라지며, 관절·근육·장기 등 다양한 부위에서 반복 출혈과 합병증을 유발한다. 특히 중증 환자는 일상생활에서도 출혈 위험이 높다.
정상적인 지혈은 혈소판과 응고인자가 함께 작용해 이뤄지지만, 혈우병 환자는 응고인자 결핍으로 지혈이 원활하지 않아 출혈이 반복되고 재출혈 위험이 높은 것이 특징이다.
(왼쪽부터) 인하대병원 소아청소년과 박정아 교수, 연세암병원 소아혈액종양과 한정우 교수
혈우병 출혈 '치료'에서 '예방'으로 패러다임 전환…약제 사용 제한 개선 필요
이날 토론회에서 인하대병원 소아청소년과 박정아 교수는 출혈 치료보다 출혈 예방에 더 집중해야 한다고 제언했으며, 연세암병원 소아혈액종양과 한정우 교수는 약제 사용 유연화를 제안했다.
혈우병의 주요 임상적 특징으로는 ▲관절 출혈(70~80%) ▲근육 및 연부조직 출혈(10~20%) ▲중추신경계 출혈(5% 미만) ▲혈뇨·혈변 등이 있다.
가장 흔한 관절 출혈은 활막염과 연골·뼈 손상을 유발해 혈우병성 관절병증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관절병증은 국내 환자의 약 45%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세계혈우연맹(WFH) 가이드라인은 혈우병성 관절병증을 예방하기 위해 적극적인 예방요법을 권고하고 있다. 특히 중증 소아 환자에서는 관절 질환이 발생하기 전, 3세 이전부터 예방요법을 시작할 것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관절 손상의 증거가 있으나 예방요법을 시행한 적이 없는 혈우병 청소년과 성인환자에서는 관절 출혈 빈도를 줄이고 질환 진행을 늦추기 위해 3차 예방요법을 시행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박정아 교수는 "혈우병 치료 목표가 변하고 있다. 과거에는 출혈 치료 중심이었다면 현재는 출혈 예방이 핵심"이라며 "혈우병을 이유로 일상생활 참여가 제한돼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어 "희귀질환은 치료 방법이 제한적이고 환자와 가족의 부담이 크다"며 "국가 차원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박 교수는 부양의무자 기준과 관련해 "실제 부양이 이뤄지지 않아도 부양 가능으로 간주돼 예방 치료 접근이 제한된다"며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의료비 증가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정우 교수는 국내 혈우병 치료 환경의 가장 큰 문제로 약제 사용 제한을 꼽았다.
한 교수는 "현재는 한 달에 사용할 수 있는 약제 용량과 횟수가 제한돼 있다"며 "사실상 정해진 양만 지급하고 나머지는 환자와 의료진이 감당해야 하는 구조"라고 말했다.
이어 "해외에서는 의료적으로 필요할 경우 의사가 용량과 횟수를 결정할 수 있지만 국내는 급여 제한과 삭감 위험으로 처방이 제약된다"고 설명했다.
특히 미국의 '340B 약가 프로그램'을 언급하며 "제약사는 메디케이드 등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혈우병 약제 공급할 때 50% 할인된 가격으로 공급해야 한다. 나머지 50%는 메디케이드에서 나온다. 그 재정은 모두 환자 재투여에 투입된다. 50% 할인은 해당 기관의 재정 이익이 아닌 환자 재투여에 활용되며, 구체적으로 심리상담사, 물리치료사 고용 등에 활용된다"고 말했다
이에 그는 고시원 라면 무한 제공 사례를 소개하며 "고시원에서 라면을 적게 두면 다들 비축해두려고 가져간다. 하지만 충분한 양의 라면을 비치해두니 더이상 라면을 훔쳐가는 일이 줄었다"며 "충분한 약제 사용이 허용되면 환자의 치료제 비축에 대한 갈증이 많이 해소될 것"며 제도 개선 필요성을 강조했다.
8일 국회에서 '혈우병 환자 건강권 보장을 위한 건강보험제도 개선 정책 토론회'가 개최됐다.
부양의무자 기준, 본인부담률 등 개선 필요…환자 맞춤 급여 기준 마련 절실
이어진 토론에서는 치료 접근성 부족이 환자의 장기적인 건강 악화로 이어질 수 있다며,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 일률적 용량 급여 기준 등 제도 개선에 대한 의견이 제시됐다.
한국코헴회 이남일 사무국장은 "희귀질환 의료비 지원제도는 부양의무자 소득·재산 기준으로 인해 치료 중단과 합병증, 장애 누적이라는 악순환이 발생한다"며 "소아 환자의 경우 안정적인 치료를 위해 본인부담 폐지와 부양의무자 기준의 신속한 폐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이사무국장은 "혈우병 치료제 급여 용량이 식품의약품안전처 허가 용량에 미치지 못해 충분한 예방 치료가 어렵다"며 "0.1% 수치 차이로 중등증으로 분류된 환자 역시 중증 수준의 출혈을 겪고 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그는 "희귀질환 치료제는 건강보험 등재까지 평균 3년이 소요된다"며 신속 등재 필요성을 강조했다.
좌장을 맡은 한국혈우재단 구홍회 이사는 "현행 급여 기준은 환자 개별 특성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일률적 용량 기준으로 인해 환자별 약물 반감기나 대사 차이를 반영하지 못하고, 이에 따라 치료 공백이 발생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혈우병 치료는 출혈 후 치료에서 예방 중심으로, 최근에는 무출혈을 목표로 발전하고 있다"며 "혈우병 환자가 출혈로부터 자유를 실현해 삶의 질을 개선하고 정상인과 같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도록 많은 관심과 노력을 당부한다"고 덧붙였다.
정부는 희귀질환 환자의 부담 완화를 위한 정책을 추진 중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보건복지부 보험급여과 정귀영 사무관은 현재 희귀·중증난치질환 환자에 대해 10% 수준의 본인부담률을 적용하고 있으며, 향후 단계적으로 이를 인하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관련 고시 발표 시기에 대한 질의에 "내부적으로 빠르게 준비하고 있다"며, 1년 이내 발표를 예고했다.
또한 희귀질환 치료제의 건강보험 등재 기간 단축 등 접근성 개선 정책도 추진 중이라고 덧붙였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신약등재부 이숙현 부장은 "현행 급여 기준이 식품의약품안전처 허가사항이나 임상 현장의 요구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다"며 "관련 부서가 관련 사안을 검토할 수 있도록 전달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희귀질환 치료제의 건강보험 등재 기간 단축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며 "허가-급여 평가 연계와 약가 협상 병행 등 제도를 정교화해 환자가 혁신 치료제에 보다 신속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