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게이트뉴스 이지원 기자] 정부가 약가제도 개편을 추진하는 가운데 제약업계에서는 기존 연구개발(R&D) 과제와 신규 개발품목의 사업성을 다시 따져보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의약품 개발 여부를 결정할 때 예상 약가와 제조원가, 개발비용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만큼 약가 변화가 이미 판매 중인 제품의 수익성을 넘어 향후 R&D 투자 판단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23일 제약업계에 따르면 실제 일부 기업에서는 개발 중이거나 검토 단계에 있던 품목을 재평가하고, 사업성이 낮다고 판단한 개발과제를 중단하는 사례가 발생하고 있다.
약가 다시 계산하니 사업성 달라져…개발 중단·파이프라인 재조정
제약기업이 의약품 개발 여부를 결정할 때는 개발 가능성뿐 아니라 향후 확보할 수 있는 수익성도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된다. 예상 약가와 제조원가, 개발비용, 영업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용 등을 종합해 투자비를 회수할 수 있는지를 따져 개발 여부를 결정한다.
특히 제네릭뿐 아니라 상대적으로 개발비용과 기간이 더 필요한 개량신약이나 신약 등의 경우 예상 약가와 시장성이 달라지면 검토 또는 개발 단계에 있는 파이프라인의 투자 판단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게 업계의 설명이다.
제약기업 관계자 A씨는 "의약품을 개발할 때는 예상되는 제조원가와 약가, 영업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용 등을 계산하고 개발비를 일정 기간 안에 회수할 수 있는지를 본다"며 "예상 약가가 달라지면 기존에 사업성이 경계선에 있던 개발과제들은 다시 검토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실제 이 기업도 약가제도 변화에 맞춰 개발을 검토하거나 진행하고 있던 품목의 사업성을 다시 살펴보고 있다.
A씨는 "기존에 개발을 검토하거나 진행하던 품목도 원가와 예상 약가를 다시 계산하고 있다"며 "원가 대비 받을 수 있는 약가를 따졌을 때 사업성이 맞지 않는 품목은 개발을 계속 가져가기 어렵고, 새롭게 개발하려던 품목들도 재조정할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미 판매하고 있는 제품은 매출이 줄더라도 계속 가져가야 하는 부분이 있지만 앞으로 새롭게 비용을 투입해야 하는 개발품목은 이야기가 다르다"며 "결국 개발에 들어갈 비용과 향후 확보할 수 있는 수익을 다시 따져 투자 여부를 결정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연구과제 중단에 연구 재투자 둔화, 인력 조정까지
이러한 약가인하 개편은 단순히 연구개발 축소뿐 아니라 재투자 둔화, 연구인력 고용 악화 등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제약기업 관계자 B씨는 "매출 규모가 크지 않은 회사에서 약가 인하로 수익이 줄어드는 것은 적지 않은 부담"이라며 "작은 회사들이 R&D를 하려면 결국 기존 사업에서 돈을 벌어 연구개발에 다시 투자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토양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다른 제약바이오업계 관계자 C씨는 "최근 개발을 진행하던 연구과제 가운데 중단된 사례가 있다. 알고 있는 것만 해도 여러 건"이라며 "아마 실제로는 관련된 기업이나 과제는 더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C씨는 "일부 기업에서는 중단된 연구 관련 인력이 정리되기도 했다"며 "규모가 있는 회사라면 해당 연구인력을 다른 부서로 이동시키는 방식으로 대응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곳에서는 정리할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정부, R&D 투자 늘린다지만…업계 "신약 개발 선순환 이어져야"
이에 정부는 약가제도 개편과 함께 제약기업의 혁신과 R&D 투자를 유도하기 위한 보상체계를 강화하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지난해 12월 발표한 약가제도 개선방안에서 국내 제약산업이 혁신 지향적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제도적 지원을 강화한다는 방향을 제시했다.
이후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 의결을 거쳐 혁신 노력과 연계한 보상체계로 혁신형 제약기업에 대한 약가 가산을 최대 4년간 보장하고, 준혁신형 제약기업을 새롭게 지정해 약가 우대 혜택을 제공하기로 했다.
특히 정부는 연구개발에 일정 수준 이상 투자하는 유망 제약기업을 지원해 '스타트업→준혁신형 제약기업→혁신형 제약기업→글로벌 수준 제약사'로 이어지는 단계별 육성구조를 만든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업계는 기업 단위의 약가 우대책과 별개로 실제 개별 개발과제의 투자 여부는 예상 약가와 제조원가, 개발비용 등을 토대로 결정될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약가 변화가 현재 판매하는 제품의 수익성뿐 아니라 앞으로 어떤 의약품에 연구개발 자금을 투입할지를 결정하는 데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제약기업 관계자 B씨는 "제약 벤처는 신약을 목표로 해야 하고 그 성과가 나와 중견사로 클 수 있는 기반을 가져야 한다"며 "약가인하로 연구개발이 위축돼 벤처가 신약을 개발하기 힘든 세상이 되면 안 된다"고 말했다.
이어 "신약 하나를 개발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서 확보한 수익을 다시 R&D에 투자하고, 해외 진출 등을 통해 확보한 재원을 또 다음 제품 개발에 투입할 수 있어야 한다"며 "그런 선순환을 통해 또 다른 좋은 제품을 개발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