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감정 의존도 높은 한국, 10년 동안 감정료 4배 올렸지만…업무 과중·부담감에 기피 여전
감정 회신까지 1~2년 소요…“의사 개인에게 책임·부담 전가하는 감정제도가 문제”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메디게이트뉴스 조운 기자] 의료계의 반발을 사는 의료소송 결과가 늘어나고 있는 가운데, 의료과실과 인과관계를 판단하는 핵심 증거인 진료기록 감정 절차에 대한 문제 제기가 커지고 있다.
실제로 기본 진료만으로 바쁜 의료인에게 소송의 승패를 좌우하는 의료감정은 시간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큰 부담이지만 감정인을 보호하거나 지원하는 제도는 부족해 진료기록 감정을 기피하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충남대 법학전문대학원 정상민 조교수(법학박사·변호사)와 서울의료원 영상의학과 김여은 과장(의학박사)가 대한의료법학회 학술지 ‘의료법학’에 게재한 ‘의료소송상 진료기록 감정의 개선방안-미국과 일본의 사례에 착안하여’ 논문에서 이같이 밝혔다.
의료소송 승패 좌우하는 진료기록 감정…회신까지 1~2년 걸리기도
의료소송에서 진료기록은 의료과실 여부와 인과관계를 판단하는 출발점이다. 하지만 진료기록은 의학용어로 작성돼 법관이나 당사자가 독자적으로 이해하기 어렵고, 해당 진료가 현대 임상의학 수준에 부합했는지 판단하려면 의료인의 전문적 지식과 경험이 필요하다.
저자들은 “의료소송에서는 진료기록에 대해 의학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이나 경험을 갖춘 제3자에게 그 전문적 지식·경험에 따른 판단을 구하는 감정 내지 감정촉탁이 긴요하다”고 밝혔다.
특히 우리나라는 법관의 감정 의존성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 원칙적으로 감정은 법관의 판단을 보조하는 증거에 불과하고, 법원은 감정결과에 기속되지 않는다. 그러나 의료소송에서는 진료기록과 의학적 판단이 법관의 전문 영역 밖에 있어 실제로는 감정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진료기록이라는 원자료에 대한 법관의 독해 및 분석능력이 의료인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고, 이 부분에 관한 한 그 판단능력은 일반인과 다를 바가 없다”며 “그 결과 법원은 진료기록 감정에 대해 감정방법이 경험칙에 반한다거나 합리성이 없는 등 현저한 잘못이 없다면 가급적 이를 존중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문제는 이처럼 소송의 승패를 좌우하는 진료기록 감정이 신속하고 충실하게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어렵게 얻은 감정결과도 보완감정, 사실조회촉탁, 재감정 등으로 이어지면서 분쟁 해결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논문에 따르면 진료기록 감정은 감정촉탁 단계부터 자주 반려되고, 감정촉탁이 반려되지 않더라도 감정 회신까지 1~2년이 소요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법원이 수개월을 기다리다 감정서 회신을 독촉하면 그제야 감정촉탁을 반려하는 사례도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 2023년 기준 1심 민사단독사건 평균 처리기간은 222일이었지만, 손해배상(의) 사건은 약 712일로 3배 이상 소요됐다. 1심 민사합의사건도 평균 처리기간은 473일인 반면, 손해배상(의) 사건은 749일로 단독·합의 사건 모두 700일 이상 걸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법원 설문조사에서도 의료감정절차 지연에 대한 문제의식은 뚜렷했다. 법관의 82.2%, 변호사의 84.4%가 의료감정절차 지연이 매우 심각한 수준이라는 데 공감한 것으로 제시됐다.
저자들은 “최근 대법원에서도 의료소송절차 지연의 주원인으로 신체감정, 진료기록 감정절차가 지연된다는 점을 지적했다”며 “전문가에 의한 감정이 사안 해결의 관건이 되는 의료소송 및 건설사건의 1심 평균처리기간이 훨씬 장기인 점에서도 엿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감정료 4배 올려도 기피 여전…“문제는 돈보다 의료인 업무 과중과 부담”
대법원은 의료감정절차 개선을 위해 진료기록 감정료를 인상했다. 과거 과목당 30만원 수준이던 진료기록 감정료는 2017년 60만원으로 인상됐고, 2025년 10월 1일부터는 문항 수 20개 이하 기준 과목당 120만원으로 조정됐다. 불과 10년도 안 돼 기본 감정료가 4배 오른 셈이다.
그러나 논문은 감정료 인상만으로는 양질의 감정 회신을 담보하기 어렵다고 봤다.
저자들은 “무엇보다도 감정절차 지연은 감정료의 다과가 결정적인 것이 아니다. 본적인 문제는 의료인의 업무 과중과 진료기록 감정에 대한 부담”이라고 지적했다.
이들은 “본연의 업무만으로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종합병원 과장이나 대학병원 교수의 입장에서는 진료기록 감정은 매우 생소한 것이어서 귀찮고 성가신 일로 여겨진다”며 “진료기록 감정이나 감정서 작성은 의료인의 일상적인 업무, 즉 컨퍼런스, 회진, 외래진료, 진료기록 작성, 수술, 검사, 처치 등과는 너무나 동떨어지고 부담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이를 차일피일 미룰 수밖에 없다”고 했다.
또한 “대부분의 의료기관은 나름의 일정이 매우 빡빡하게 채워져 있고 이를 대체할 인력도 거의 없다”며 “진료기록 감정 등을 주로 처리하는 조직과 인력도 없다”고 설명했다.
결국 진료기록 감정 지연의 원인은 현행 제도가 의료현장에 없는 업무를 개별 의료인에게 사실상 떠넘기고 있고, 감정인을 보호하거나 지원하는 구조도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진료기록 감정의 또 다른 쟁점은 공정성과 중립성이다. 의료소송에서 원고 측은 감정인이 같은 의사인 피고 측에 우호적일 수 있다고 의심하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의료인 입장에서는 원고 측 항의나 소란, 민원 부담 때문에 감정을 맡기 꺼리는 현실도 있다.
저자들은 “현재의 제도는 대학병원 교수나 종합병원 과장 이상의 지위에 있는 분들은 직업윤리, 사명감 및 자긍심이 확립돼 있기 때문에 사소한 부탁에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에만 의지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감정의 공정성과 중립성을 오로지 감정인 개인의 양심과 윤리에 맡겨두고 있으나, 감정인 개인에게 모든 책임과 부담을 전가하는 태도를 지양해야 한다”며 “감정인을 부당한 청탁이나 압력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안전장치를 제도적으로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미국은 전문가 증언·일반상식 원칙 활용…일본은 사적의견서 중심
논문은 개선방안 모색을 위해 미국과 일본 사례를 검토했다.
미국은 법원이 지정한 감정인보다 당사자가 각자 전문가 증인을 세워 증언하게 하는 방식이 중심이다. 전문가 증인은 의료인의 주의의무 기준, 그 위반 여부, 의료행위와 손해 사이의 인과관계 등에 대해 의견을 진술할 수 있다.
다만 전문가 증언이 남용되지 않도록 법관이 문지기 역할을 하며, 해당 증언이 충분한 사실이나 자료에 기초했는지, 신뢰할 수 있는 원칙과 방법에 따른 것인지, 이를 사건에 신뢰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적용했는지를 판단한다.
또 미국은 전문가 증언이 원칙적으로 필요하더라도 일반인의 상식으로 명백히 판단할 수 있는 사안에서는 전문가 증언 없이 과실을 인정할 수 있는 ‘일반상식의 원칙’도 활용한다. 예컨대 수술 부위에 이물질을 남긴 경우, 환부가 아닌 멀쩡한 부위를 수술한 경우, 의식 없는 환자가 수술 중 화상을 입은 경우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일본은 우리나라와 유사한 감정제도를 갖고 있지만, 의료과오소송에서 법원 주도의 감정을 채택하는 비율은 높지 않다. 감정의 장기화와 고비용, 감정인 선임의 어려움 등을 고려해 당사자가 제출하는 사적 의견서가 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저자들은 “일본의 경우에도 당사자가 자신에게 협력하는 협력의의 의견서를 적극 이용하고, 필요한 경우가 아닌 한 법원에 의한 감정을 지양하고 있다”며 “사감정을 활용해 고비용·장시간을 특징으로 하는 감정절차를 피함으로써 의료소송 전체의 신속과 경제를 확보하는 것”이라고 했다.
“사감정 활용하고 반대신문으로 검증…의료계 실무에 맞는 감정제도 필요”
논문은 의료소송에서 법원 주도 감정에만 의존하는 현행 구조를 보완하기 위해 당사자가 의뢰한 전문가 의견서, 이른바 사감정을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이들은 “사감정이 공정성·중립성이 결여돼 있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배척할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을 실질적으로 비교해 합리성 유무를 신중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사감정의 공정성 논란은 반대신문 등을 통해 검증하고, 법원 주도 감정은 최후적 수단으로 활용하는 방식이 의료소송 지연을 줄이는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저자들은 진료기록 감정제도 개선의 핵심은 법조계 시각이 아니라 의료계 실무에 부합하는 제도 설계라고 강조했다. 현재는 법원이 감정인을 선정한 뒤 방대한 진료기록과 질문지를 보내 회신을 기다리는 구조지만, 의료현장에는 이를 전담할 조직과 시간, 제도적 보호장치가 부족해 감정 지연과 부실 감정이 반복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들은 “현행 진료기록 감정 절차가 의료계 현실과 동떨어져 의료인에게 무리하고 부담스러운 요구를 하고 있는 점이 근본 원인이자 한계”라며 “감정인을 부당한 청탁이나 압력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안전장치도 제도적으로 마련해야 한다”고 밝혔다.
대안으로는 사감정 활성화와 반대신문 보장, 일반상식의 원칙과 사실추정의 원칙 활용, 의료계 실무에 맞는 감정제도 설계,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의 수탁감정 활용 등이 제시됐다.
저자들은 “의료소송에서 진료기록 감정은 거의 필수적이고 결정적이지만, 현재 제도는 신속성과 효율성, 공정성과 중립성, 감정서의 신뢰성 측면에서 모두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며 “의료소송 장기화와 당사자 부담을 줄이기 위해 감정제도의 구조적 개선이 필요하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