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시간 26.05.11 06:53최종 업데이트 26.05.11 0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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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실 주취환자와 집행유예 판결문

[칼럼] 박지용 공정한사회를바라는의사들의모임 대표·대한병원의사협의회 조직강화이사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메디게이트뉴스] 응급실에서 일하다 보면 수의사가 부러워지는 순간이 한 번씩 찾아온다. 취객과의 소통은 말 못 하는 강아지와의 대화보다도 어려운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얼마 전 주인을 물려는 불독에게 의자를 집어 던지는 강형욱 씨의 영상을 보면서도, 솔직히 만취 환자보다 차라리 불독이 대하기 쉽겠다는 생각을 했다. 불독은 그것이 폭력일지라도 대화수단이 존재는 하기 때문이다.

최근 한 판결이 의료계의 공분을 샀다. 1차례 CT 촬영 후 퇴원했는데 뇌경색이 발생한 환자 사건이었다. 응급실에 내원한 주취 환자에 대해 적절한 신경학적 검사 없이 CT만 시행한 후 퇴원시켰고, 이후 환자에게 뇌경색으로 인한 마비가 발생했다. 담당 의사 2인에게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되었다. 환자의 최종 진단명은 척추동맥 박리에 의한 소뇌경색으로, 20대 환자에게서는 매우 드물게 나타나는 형태였다. 게다가 일반적인 소뇌경색에서는 잘 동반되지 않는 복통까지 호소하던 환자였다. 이런 환자에서 처음부터 뇌경색을 의심하고 정밀한 신경학적 진찰을 시행할 응급실 의사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의사들이 더 분노한 지점은 다른 데 있다. 재판부는 "신경학적 검사를 시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과실의 핵심 근거 중 하나로 들었다. 주취 환자에게 신경학적 검사를 시도해 본 경험이 있는 의사라면, 이 판단이 얼마나 임상 현실과 동떨어진 것인지를 즉시 알아챈다. 신경학적 검사란 환자가 의사의 지시를 알아듣고, 따라 하고, 자신의 감각과 운동을 정확히 보고할 수 있어야 비로소 성립하는 검사이다. 대화가 통하는 고령 환자에서도 어려운 부분인데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만취 환자에게 이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영상 검사도 마찬가지다. CT와 MRI는 의외로 환자의 최소한의 협조를 전제로 한 검사이다. 촬영 도중 환자가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영상은 쓸 수가 없다. 응급실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 의사 중에, 주취 환자의 비협조로 영상 검사에 고생해 본 적 없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머리를 흔들지 못하게 양손으로 꽉 붙잡아도, 주취 환자는 기어코 고개를 힘차게 흔든다. CT 결과는 당연히 엉망이다. 필자 역시 뇌출혈 수술 가능성이 높던 환자가 촬영대 위에서 끊임없이 머리를 움직이는 바람에 CT촬영에 한 시간 넘게 걸린 경험이 있다. 윗년차 선생님에게 "당장 수술해야할 수도 있는데 왜 시간이 1시간 넘게 지연되느냐"는 불호령이 떨어진 것은 물론이다.

뇌경색 진단에 보다 정밀한 뇌혈관 CT나 MRI의 경우 사정은 한층 심각해진다. 뇌혈관 CT는 조영제가 혈관에 퍼지는 짧은 순간을 정확히 포착해야 하고, MRI는 엑스레이가 아닌 자기력을 이용하기 때문에 미세한 움직임에도 영상 전체가 흐트러진다. 의사가 CT나 MRI를 찍지 않은 것은 찍기 싫어서가 아니라, 주취 환자에게서의 영상 검사가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환자가 영구 장애를 입었는데 담당 의사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 것이 과연 정당하느냐고  반문하는 법조인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법률가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주취 환자에게서 신경학적 검사와 영상 검사가 어떤 모습으로 진행되는지 단 한 번이라도 직접 확인할 기회가 있었다면 집행유예라는 금고형은 결코 내릴 수 없었을 것이라 본다.

판사들이 한 번씩 응급실에서 밤을 새 봐야 한다. 그것도 주취 환자들이 몰려드는 자정부터 새벽 3시 사이에. 잠이 든건지 의식을 잃은건지 분간되지 않는 환자를 깨워보고, 머리 휘젓는 환자를 양손으로 붙잡아 보고, 한 시간이 지나도 찍을 수 없는 CT 영상을 왜 안 찍느냐며 윗년차의 불호령을 들어 보아야 한다. 판결문에 쓰이는 서류에서는 모든 환자가 말도 잘 듣고 의사가 검사하라면 할 것 같겠지만, 응급실은 그런 곳이 아니다. 응급실에서 단 하룻밤만 보내고 나면, 이런 판결문은 결코 쓸 수 없을 것이다.


※칼럼은 칼럼니스트의 개인적인 의견이며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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