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게이트뉴스 이지원 기자] 의료진과 환자 모두를 위한 의료시스템을 만들기 위해서는 '의료사고 안전망'을 구축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의료소비자-공급자 공동행동(공동행동)은 11일 '더나은 의료시스템을 함께 만들어 나가는 의료소비자-공급자 공동행동 기자간담회'에서 의료사고 안전망은 환자안전 강화에서 시작된다며, 독립적인 공적 조사 기구 설치 등을 제안했다.
이날 기자간담회에는 서울대 의과대학 강희경·곽재건·오주환·하은진 교수와 GCN녹색소비자연대 유미화 상임대표, 김미리 부장, 한국YWCA연합회 조은영 회장, 박은실 사무총장, 안정희 부장, 한국중증질환연합회 김성주 대표, 뇌전증환우회 노경범 대표가 참석했다.
민·형사 소송 아닌 면허 관리, 선 보상 후 구상권 청구로 의료진·환자 보호
GCN녹색소비자연대 유미화 상임대표는 "1년 4개월 동안 의정갈등을 겪으며 의료소비자,환자, 의료공급자가 함께 풀어야 할 중요한 과제를 깨달았다"며 "우선 해결해야 하는 과제는 의료사고 우려에 따른 의료진의 필수의료 기피 현상을 줄이고, 환자와 가족의 삶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유 상임대표는 "의료사고와 관련된 민·형사 소송과 처벌은 의료인의 의료행위를 두렵게 하고, 의료소비자와 공급자 간 신뢰를 무너뜨리고, 의료사고를 겪은 환자·보호자를 소송에 의존케 했다"며 "전 정부는 필수·지역의료 강화 대책으로 '환자-의료진 모두의 의료사고 안전망 구축'을 추진했다. 하지만 의료사고를 개인과 개인간의 민·형사 책임과 보상의 문제로만 바라보면 의료시스템은 더 위태로워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유 상임대표는 "위험을 동반하는 의료행위가 항상 좋은 결과를 얻기 어렵다. 악결과의 책임을 의료진 개인에게만 묻는다면, 누구도 고위험 의료행위를 기피할 것"이라며 "우리 의료시스템을 살리는 의료사고 안전망 구축은 환자 안전 강화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공동행동은 의료사고를 비롯한 환자 안전 사건의 원인을 조사해 밝히는 독립적인 공적 조사 기구(가칭 '환자 안전 조사 기구') 설치와 의료사고 피해 환자에 대한 신속하고 충분한 보상 체계 구축을 요구했다.
서울대 의과대학 강희경 교수는 "뉴질랜드의 건강 장애 위원회, 독일의 의료사고 감정위원회, 덴마크의 환자 안전청, 스웨덴의 환자 안전 감사위원회 등이 예"라며 "의료사고는 의료 전문가가 조사할 때 사실관계를 제대로 확인할 수 있다. 상설 조사 기구 전문가의 독립적이고 객관적인 조사를 통해 사실관계와 근본 원인을 확인하고, 핵임 추궁 대신 시스템 개선과 재발 방지에 중점을 둬야 한다"고 설명했다.
조사 결과는 투명하게 공개하고, 환자 안전 정책 개선에 반영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의료인의 과실이 밝혀지는 경우, 고의나 범죄가 아니라면 형사 처벌 대신 면허 관리 방식으로 징계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의료 과실이 면허 정지나 취소 사유가 되지 않는 한국과 달리, 영국과 일본, 프랑스, 독일, 캐나다 등은 의료 과실을 ▲재교육 ▲특정 의료행위 제한 ▲면허 정지·취소 등으로 징계한다.
강 교수는 "영국, 일본, 프랑스, 독일, 캐나다 등 선진국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는 인간의 불완전성을 인정하되, 같은 원인으로 환자 안전 사건이 반복되지 않도록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의료는 민·형사 소송에 대한 두려움으로 무너지고 있다"며, 법조계에 의료사고 재판에 적용되는 판결 기준을 공표할 것을 요구했다.
강 교수는 "1997년 뉴질랜드의 형법 개정, 2018년 영국의 의료분야 중과실치사에 대한 윌리엄스(Williams) 리뷰, 올해 발표된 미국의 의료 과실에 관한 공식 기준을 참고해야 한다"며 "공정하고 객관적인 원칙에 따른 판결이 있을 때 우리나라 의료가 살아날 것"이라고 언급했다.
한국중증질환연합회 김성주 대표는 의료사고 피해 환자 보상과 관련해 "꼭 필요한 진료를 받는 과정에서 불의의 의료사고가 발생하는 경우, 환자와 가족의 빠른 회복을 돕기 위해 의료사고 안전망 기금을 조성해 책임소재와 무관하게 우선 신속하고 충분한 보상을 할 것을 제안한다"고 밝혔다.
김 대표는 "우리나라는 전국민이 국민건강보험에 가입해 보험료를 납부하고 있다"며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도움을 주는 제도 취지를 살려 국민건강보험 재정 등으로 의료사고를 겪는 환자와 가족을 우선 도와야 한다"고 했다.
단 조사 결과 의료기관의 귀책사유가 발견될 경우, 의료사고 안전망 기금은 추후 의료기관에 구상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부연했다.
공동행동에 따르면 뉴질랜드(사고보상공사), 영국(NHS Resolution), 프랑스(국가 의료사고 보상기금, ONIAM) 등이 이미 이같은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공정한 조사, 신속한 보상, 책임 있는 징계…민·형사 소송 줄이고, 중증·필수의료 유입 확대할 것"
이어진 질의응답에서 공동행동은 조사와 보상을 철저히 분리하고, 신속한 선보상과 공정한 원인 규명, 면허관리 중심의 징계 체계를 골자로 하는 의료사고 안전망을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희경 교수는 그간 의료개혁특위에서 논의된 의료사고 안전망과 차이가 있는지 질의에 "가장 중요한 것은 보상과 조사가 완전히 독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보상은 국가 책임이어야 한다는 주장은 이미 많이 나왔다. 의료수가에 반영된 부분을 활용해 기금을 조성할 수 있다"며 "의료수가에 포함된 위험도가산 항목을 기금으로 전환하면 연 3000억원 규모의 재원을 확보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이어 사고 발생 후 바로 형사고발이나 민사소송으로 가는 대신, 독립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조사기구가 먼저 작동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는 의료기관이나 수사기관과는 독립된 기구로, 의료 전문가와 전임 조사관이 상시 소속돼 사건의 원인을 체계적으로 조사·분석할 수 있도록 한다.
강 교수는 "의료사고 과정에서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 제대로 알기 어려워 소송을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환자의 답답함을 조사기구가 해소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의사 역시 경찰서 참고인 진술 과정 대신 조사기구를 통해 설명하는 것이 더 수월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유미화 상임대표는"정부는 의료사고로 보호받을 수 있는 진료·사고의 범주를 필수의료로 제한했다. 하지만 필수의료에 대한 규정이 애매모호하다"며 "진료·치료를 목적으로 하는 행위는 모두 범주 내에 들어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현행 제도에서 환자와 보호자가 민·형사 소송을 택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해서는 "환자와 의료소비자는 충분한 설명과 사과가 없어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민·형사 소송을 선택한다. 특히 의료사고를 입증할 수 있는 여력이 없어 민사 보상을 위한 형사 소송을 진행하는 지경"이라며 "공적 보상제도를 활용하면 환자와 보호자를 보호할 수 있다. 또한 조사기구를 활용하면 그 원인을 규명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공동행동은 선보상-후조사 체계와 면허관리 중심의 징계가 민·형사 중심 사고 해결 구조를 전환하고, 나아가 신뢰 회복에 기여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오주환 교수는 선진국 사례를 들어 선보상 체계 실현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오 교수는 "뉴질랜드는 사고보상기금을 운영해 의료사고를 포함한 다양한 사고에 대해 한 달, 한 달 반의 심의 과정을 거쳐 신속하게 보상한다"며 "민사소송은 보상을 신청하는 순간 포기 절차가 동시에 진행된다. 형사소송은 가능하지만, 지난 수십 년간 단 한 건만 제기됐을 정도로 실효성이 입증됐다"고 했다.
이어 "정부의 특례법은 기소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이를 통해 의사를 보호하려 했지만, 그 보호는 적절하지 않았다"며 "기소를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할 필요가 없는 환경을 만들기를 원한다. 민·형사 소송을 통해 얻는 이익보다 공적 조사기구에 의뢰하는 것이 더 좋은 결과를 얻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하은진 교수는 "신경외과 중환자실 등에 종사하는 의료진은 장애, 사망 등 많은 위험에 노출된다"며 "이 때문에 중증·필수의료를 기피하는 문화가 형성됐고, 공급자 유입이 안 되는 상황이다. 이런 문화를 바꾸기 위한 방법 중 하나가 면허 관리"라고 말했다.
그는 "면허관리를 활용하면 의료 행위가 미숙한 경우 재교육하거나, 해당 행위를 하기 전까지 면허를 정지할 수 있다"며 "이는 의료진 입장에서는 더 강력한 제재지만, 시스템적으로는 중증·필수의료 의사를 잃지 않고, 장기적으로는 행위의 질을 높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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