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시간 25.12.30 03:28최종 업데이트 25.12.30 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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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주도 의사 전문직업성 파괴, 의료 붕괴는 이제 시작일 뿐

[칼럼] 안덕선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원장·고려대 의대 명예교수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메디게이트뉴스] “의사의 전문직업성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아주 간단한 비유를 적용해 본다. “국가가 군대를 양성하는데, 싸우지 않으려는 군대로 만들면 어떻게 되겠는가?”라는 반문으로 답을 해본다. 물론, 복합적인 특징을 지닌 의사의 전문직업성을 명쾌한 정의로 정리해 표현하기는 쉽지 않다.

전문직업성 자체가 단순한 정의(definition)가 아닌, 과정(process)의 의미가 훨씬 강하기 때문이다. 명확한 정의를 내리는 대신에 정직, 근면, 환자 우선, 존경, 책무성 등 온갖 미사여구의 의사 개개인 차원의 바람직한 도덕적 구인(constructs)이나 단체적 관점의 특성인 임상적 독립성, 자율규제, 직무 윤리 등을 제시하기도 한다. 

코로나19 사태가 시작될 무렵에 과거 문재인 정부는 연일 자화자찬 격 ‘K-방역’ 선전에 힘을 쏟았으나 망극하게도 대구 지역에서 걷잡을 수 없을 정도의 폭발적인 감염병 확산 사태를 겪었다. 그 당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많은 의사들이 전국에서 자발적으로 대구에 모여들었다. 역사적으로 무능했던 정부를 대신해 싸웠던 의병(義兵)의 전통이 ‘의병(醫兵)’으로 발현된 것이었고, 의사의 전문직업성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 사례로 기록됐다.

특별한 이유 없이 의사에 대한 반감이 상당했던 당시 정권은 이어진 의-정 사태에 대해 대통령은 “전장을 이탈한 군인과 같은 의사”라고 표현해 전시 상황에서 즉결 총살 대상임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현대적 개념 조직 의료 운영 체계 정부 정책은 통제와 압박 전문직업성에 걸림돌 

근무지를 떠난 전공의가 총살 대상이 되는 격한 표현은 지난 윤석열 정권에서 더욱 노골적인 포고령으로 구체화했다. 48시간 내 미 복귀 전공의는 ‘처단’하겠다는 끔찍한 포고문이 미디어를 통해 알려진 것이다. 이들 대통령의 발언을 보면 아직도 우리나라의 의사-환자 관계가 현대적 의료제도에 의한 개념은 아닌 것으로 파악된다. 아마도 근대화 이전의 ‘의사와 환자’가 주제인 유명 서양화가 보여주듯이 의사가 어두운 방에서 중병으로 신음하는 환자의 손을 잡고 고요히 바라만 보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현대는 환자 개인의 집이나 방이 아닌 중환자실에서 각종 의료기기와 수액, 그리고 신체에 주입되는 튜브와 주삿바늘이 치료에 이용된다. 의사와 환자의 개인적 관계 대신 현대적 개념의 의료제도인 ‘조직화 된 의료’가 개입해 운영되고 있다. 의사도 당직 근무가 있고, 휴일이라도 의료진은 항상 대기 중이다. 주말이나 장기간의 황금연휴에도 국가의 의료체계는 빈틈없이 작동한다. 이런 것이 현대의 조직 의료의 특성임에도 ‘전공의 파업’에 대해 환자를 버렸다는 식의 시대착오적 논리로 국가의 최고지도자는 강하게 몰아붙였다. 이러한 상황을 보면 우리나라의 의료체계(제도)의 발전이 국민의 사고를 시대적으로 훨씬 추월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승리하는 군대를 위해 국가와 정부는 최고의 교육과 훈련을 제공하고, 적정한 보상도 해야 한다. 그리고 군대라는 위험 직군을 위해 안전망도 촘촘하게 잘 만들어야 한다. 전장에서는 전력을 강화하고 장병들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병사들의 기본적인 먹거리와 장비 등 군수물자를 지급에 사투를 벌인다. 이와 비슷한 논리가 의사의 ‘전문직업성’에도 잘 나타난다.

미국과 유럽의 내과 의사들의 큰 협동과제였던 의사 전문직업성에 관한 논문 ‘Alliance Between Society and Medicine’에 의하면, 현재의 의료제도(체계)와 정책 자체가 의사 전문직업성을 방해한다고 기술한다. 그리고 이런 어려움은 의사 개인이나 집단의 힘으로 변화시킬 수 없고, 아마도 최고지도자를 위시한 장관급 혹은 선출직인 국회의원 등이나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실제는 어느 나라도 현대의 복잡한 의료제도(체계)를 잘 운용할 역량은 없는 것이 현실이고 사실이다. 현대 의료는 엄청난 예산이 투입되는 국가적 사업이고, 의료를 수월하게 작동하기 위해서는 관련된 수많은 조직이 참여해야 한다. 복잡한 현대적 의료를 원활히 운영하고 작동하려면, 마치 잘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군대를 양성하듯이 의사가 자발적이고 소신껏 역량을 발휘하도록 유도하고 지원하는 제도와 정책을 만들어 펴나가야 한다.

그리고 사회는 상호성을 바탕으로 바람직한 의료환경을 의사 집단과 함께 고민하고 만들어가야 한다. 이것이 곧 암묵적 사회계약이고, 의사의 전문직업성이 작동하는 전제적 원리이다. 사회는 의사와 협력해 보장성 강화를 비롯해 의료안전망, 교육과 훈련, 공정한 보상, 이해 갈등 해결과 관리 등 서로 얽혀 있는 복잡한 사안들을 함께 해결해야 한다. 의사 개인이나 단체의 힘만으로 이런 것들이 구축될 수 없는 세상에서 사회와 상호 협력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럼에도 이런 개념이 부족한지, 아니면 아예 없는 것인지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미완의 의료체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를 의사 개인과 집단의 도덕적 문제로 귀속시키고 있다. 이런 이해가 없으니 ‘공공성’을 앞세워 외치는 국가에서 정작 선진국에서 보여주는 의과대학생, 전공의 학비 및 급여 지원, 연구비 지원, 공정한 의료 보상 체계 등에 대한 사회 계약적 정책과 기본적인 지원 없이 의료 소비의 사회화가 아닌 소비 장려를 촉진하고 있다. 이를 반대하는 의사들은 비도덕적 집단으로 비난하며 압박한다.

우리 사회는 그 어떤 선진국도 하지 않는 ‘의료의 형사 범죄화’의 굴레를 마치 좋은 의료를 위한 것이라는 궤변도 통용된다. 의료 분야의 형사 범죄화로 이미 필수 의료의 끔찍한 붕괴 현상을 목도 하면서도 보통 수준도 안되는 ‘특례법’을 만들어 마치 의사에게 주는 엄청나게 큰 특혜나 선심성 조치로 보이는 사회적 착시현상도 만들어 대중들을 교란하고 있다. 

고질적인 정치 후진성으로 당나라 군대 같은 의료체계 유도 러스트 벨트 촉진

어찌하여 우리나라 사회는 의사 전문직업성의 발휘를 위한 환경 조성은 뒤로 하고 정부의 정책 실패 등 모든 사안을 의사 개인의 도덕적 문제로 변질시키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되면 결국 의사나 의료제도, 그리고 우리 사회 모두에게 불행한 일로 닥치는데 말이다. 전문직은 사회의 중심적이고 보편적 가치를 창출하는 집단임에도 이를 도덕적으로 일탈한 집단으로 몰아세워 사회 전반에 대한 불신을 증폭시킨다.

본질적 중심을 잃은 시민단체나 환자 단체는 국민의 의사를 대신한다는 복지부나 정치인의 선동에 적극 동조하는 ‘거수기’ 역할에 앞장서고 있다. 좌절한 의사들은 이제 고부담 의료로 발생하는 불평등한 중재나 조정, 그리고 전과자가 되는 형사처벌을 피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작동하는 ‘필수 의료 기피 현상’은 전문직업성의 새로운 표준이 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는 마치 군인을 양성해도 늘 전역을 희망하거나, 쉬운 보직을 추구하는 군대를 만들고 있는 셈이다. 젊은 학생과 의사들이 자리를 박차고 나간 것은 이들의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라 국가 주도로 사회가 깨어놓은 암묵적 사회계약인 것이다.

의사의 전문직업성의 포기도 결국은 그 전제가 되는 암묵적 사회계약이 역사, 문화적으로 체화된 경험을 하지 못하여 생기는 우리 사회의 정치적 후진성의 부산물이라고 체념하기에는 그 후폭풍이 어떠할지 너무나도 걱정이 앞선다. 이제 의사 수는 많아도 정작 치료받을 의사는 없어지는, 마치 홍수 끝에 먹을 물이 없다는 역설적인 의료 붕괴가 피하기 어려운 현실로 닥쳐오고 있다. 
 
<참고문헌>
Alliance Between Society and MedicineThe Public’s Stake in Medical ProfessionalismJordan J. Cohen, MDSylvia Cruess, MDChristopher Davidson, MB 

※칼럼은 칼럼니스트의 개인적인 의견이며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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