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시간 15.05.11 06:15최종 업데이트 15.05.11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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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 여지가 없는 혈우병 환자들

혈우재단이 치료약, 병원 독점하는 구조

환자들 "새로운 치료제 쓰고 싶어도 못한다"

한국혈우재단 부설의원을 다니던 40대 K모 혈우병 환자는 4년 전 서울 소재 내과의원으로 옮겼다.
 
혈우재단 산하 의원에서 K씨가 원하는 약제로 교체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K씨는 수 년 전부터 기존에 투여하던 '그린모노(녹십자)'를 다른 제약사의 약제로 바꿔달라고 요구했다.
 
교체를 요구한 이유는 '그린모노'의 에이즈 논란 때문이었다.

2005년 한나라당 고경화 의원이 그린모노 원료에 AIDS 오염 혈액이 쓰였다고 발표하면서 환자들은 불안에 떨었다.
 
게다가 녹십자의 또 다른 혈우병 치료제 '훽나인' 투여 후 HIV(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됐다며 환자 등 95명이 제기한 소송은 1심과 2심 판결이 엇갈리며 결론이 안나는 상황이었다.
 
K씨는 "만에 하나 내가 에이즈에 감염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항상 불안했다. 몇 년 동안 약제 교체를 요구했지만 '별다른 문제가 없는 한 교체해줄 수 없다'는 답만 들었다"고 회상했다.
 
 


국내 혈우병 환자의 70%가 집중된 한국혈우재단 부설 의원이 특정 제약사의 약만 처방하면서 치료제 선택을 가로막고 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다.  
 
혈우 환자를 위해 운영돼야 할 재단이 후원 관계에 있는 녹십자 관련 제품 위주로 공급하고, 다른 제약사의 약은 의도적으로 배제한다는 것이다. 
 
혈우재단은 혈우병 치료제 제조업체인 녹십자의 고 허영섭 회장이 치료 지원을 위해 1991년 설립한 사회복지법인이다.

설립 당시 환자등록 사업, 환자부담금 지원 등 편의를 제공한 덕에 현재 재단 부설의원 3곳(서울, 부산, 광주)에서 국내 혈우병 치료의 2/3를 독점하는 독특한 진료 체계를 형성했다. 

 
문제는 재단이 다양한 치료제를 공급하지 않아 환자들이 정작 필요로 하는 치료를 받을 수 없다는 것.
 
화이자의 유전자재조합 치료제 '진타'는 2013년 3월 재단 의원에 랜딩됐지만 현재까지 한 건도 처방되지 않았다.
 
'진타 솔로퓨즈'는 별도 재조합 과정 없이 한 번에 주사 가능하도록 복용 편의성을 개선한 제품이다. 이는 단순히 편의성 문제가 아니라 투여시간 단축과 연관된다.
 
익명을 요구한 혈우병 P모 환자는 "혈우병은 급속한 출혈을 동반하기 때문에 초반 시간 싸움"이라면서 "투여 시간 단축은 장시간 출혈과 출혈로 인한 합병증을 막기 때문에 중요하지만 재단 의원에서는 맞고 싶어도 처방하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또 지난해 바이엘은 혈우재단에 유전자재조합 치료제 '코지네이트FS'를 입고하지 못해 결국 국내에서 철수했다.
 
다른 의료기관을 통해 코지네이트로 치료받고 있던 환자들은 하루 아침에 약제를 잃은 것이다. 환자들의 바이엘 앞 시위와 항의 방문 끝에 일정기간 추가 공급을 약속 받았지만, 언제 공급이 중단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한국코헴회(환우 단체) 관계자는 "재단 의원이 특정 제약사의 약제 위주로 공급하는 상황은 단순히 환자가 일부 약품을 처방받지 못하는 문제를 넘어, '코지네이트 중단 사태’가 보여주듯 치료제 공급 불균형의 피해가 고스란히 환우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지적했다.
 
이 관계자는 "환자들을 위해 운영돼야할 재단이 오히려 새로운 치료제와 개선 정보를 차단하고 치료 선택의 폭을 좁히고 있다"면서 "일부 제약사 제품에 편중해 독과점을 방치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국내 혈우병 치료제 시장은 녹십자 관련 제품('애드베이트'-녹십자가 판매대행, '그린모노', '그린진F' 등)이 약 90%를 점유하고 있다. 나머지 10% 안팎을 '진타', '코지네이트', '모노클레이트-P' 등이 차지한다. 
 
반면, 해외 시장은 상황이 다르다.

전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혈우병 치료제는 박스터의 '애드베이트', 바이엘의 '코지네이트', 화이자의 '진타'다.
 
 
혈우재단 "녹십자를 위한 재단 아니다"
 
혈우재단은 이런 의혹과 문제 제기에 전면 반박했다.
 
혈우재단 관계자는 "재단에서 녹십자 제품만 처방한다는 건 억지스런 주장"이라며 "재단에선 5개 제약사 약을 공급하는데 지난해 화이자의 처방액은 230억원"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230억원은 혈우병 B형 치료제 '베네픽스'의 처방액으로, B형의 경우 다른 선택 약제가 거의 없어 베네픽스에 몰릴 수밖에 없다.
 
이 관계자는 "녹십자는 재단을 설립한 고 허영섭 회장의 유지를 받들어 재단에 계속 후원해주고 있을뿐 처방에 간섭하지 않는다"고 못박았다.
 
재단 떠나 갈 곳 없는 혈우병 치료 현실
 
더 큰 문제는 환자가 재단 부설의원을 떠나고 싶어도 선택할 수 있는 의료기관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코헴회 관계자는 "시장이 재단 의원에 쏠리면서 대형병원에서 혈우병 치료를 등한시 했고, 의료진 후진 양성도 안됐다. 혈우재단을 다시 키워주는 악순환의 구조"라고 꼬집었다.
 
치료 약제가 구비되거나 혈우병 응급 체계가 갖춰진 종합병원도 적다. 수도권에서는 세브란스병원, 강동경희대병원, 김효철 내과 등 소수만 약제를 구비하고 있다.
 
막상 환자들이 중증 출혈로 응급 및 입원실을 찾을 때, 갈만한 종합병원이 없는 것이다.
 
을지대병원 소아청소년과 유철우 교수는 "환자들이 의원에서 약만 타는 진료 체계가 구축되어 있다 보니 응급 상황 대처가 어렵다"고 지적했다.
 
유 교수는 "가까운 생활권 안에서 포괄적인 혈우병 치료가 이뤄져야 한다"면서 "지역마다 혈우병 거점병원을 지정하고 해당 병원에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등 상급병원의 혈우병 치료 유인책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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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연주 기자 (yjsong@medigatenews.com)열심히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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