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경제 세종=이준형 기자] 다음달부터 한국전력이 발전공기업에서 전기를 사올 때 전력거래 대금을 늦게 지급할 수 있게 됐다. 정부가 한전이 경영난으로 제때 돈을 지급하지 못해 전력거래가 중단되는 사태를 막기 위해 관련 규칙 개정에 나섰기 때문이다. 지난해 역대 최대 적자를 낸 한전은 올해 이미 12조원 규모의 회사채를 발행했을 정도로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다.
16일 관계 부처에 따르면 한국전력거래소는 지난 11일 산업통상자원부, 발전공기업 등과 함께 규칙개정실무협의회를 열고 ‘전력거래대금 결제일에 관한 규칙’을 개정하기로 했다. 한전이 발전공기업에 전력거래 대금을 제때 납부할 수 없을 경우 지급 일정을 다음 차수로 미룰 수 있도록 하는 게 골자다. 전력거래소는 오는 18일 규칙개정위원회를 열고 개정안을 심의·의결할 계획이다. 이후 산업부 장관이 개정안을 승인하면 다음달 1일부터 적용된다.
본래 한전은 한 달 동안 4차례에 걸쳐 발전사에 전력대금을 납부한다. 현행 규정상 한전이 대금을 납부해야 하는 시기를 지키지 못하면 채무불이행으로 간주돼 다음날부터 전력거래가 정지된다. 사실상 국내 유일한 전력 구매자인 한전의 전력거래가 중단되면 발전사 피해는 물론 전력 수급 차질도 불가피하다.

'재정난' 한전, 정부에 규칙 개정 건의
한전이 최근 전력거래소에 결제일 규칙 개정을 건의했던 이유다. 이번 개정은 주무부처인 산업부 등이 한전 건의를 받아들여 추진됐다. 규칙개정실무협의회가 실무적 논의를 매듭지은 데다 산업부 등이 개정안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를 갖고 있는 만큼 개정안은 다음달 1일부터 적용될 것으로 보인다. 전력업계 관계자는 “개정안 취지는 한전의 전력거래가 중단되는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자는 것”이라며 “실무적 협의가 끝난 상황이라 남은 행정 절차에서 개정안이 바뀔 가능성은 낮다”고 설명했다.
정부가 결제일 규칙 개정에 나선 건 악화일로로 치닫는 한전의 재정난 때문이다. 앞서 한전은 지난해 사상 최대 규모인 5조8601억원의 영업적자를 냈다. 증권가는 한전이 지난 1분기에만 5조3000억원의 적자를 낸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해 전체 적자에 육박하는 규모다. 최근 우크라이나 사태 등 지정학적 갈등으로 연료비가 급등해 올해 적자 규모가 20조원을 넘어설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회사채도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한전은 올해 자금조달을 위해 지난 12일 기준 11조9400억원의 신규 회사채를 발생했다. 불과 약 4개월 동안 발행한 회사채가 지난해 한 해 동안 발생한 전체 회사채(10조4300억원)를 넘어선 셈이다.

연료비 연동제 '유명무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전력거래 대금을 늦게 지급하는 것을 허용하는 방안보다 근본적인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제유가 등 연료비 상승세에 비해 전기요금 인상은 지지부진했기 때문이다. 실제 한전 수익성을 결정짓는 핵심 지표인 전력도매가격(SMP)은 지난달 기준 킬로와트시(kWh)당 192.75원으로 전년 동월(84.22원) 대비 2배 이상 뛰었다. 전기요금이 동일할 경우 SMP가 오를수록 한전 수익성은 악화된다.
연료비 연동제 정상화가 시급하다는 의견도 있다. 연료비 연동제는 유가, 천연가스 등 연료비 수입 가격에 맞춰 분기마다 전기요금을 조정하는 제도로 지난해 1월부터 시행됐다. 하지만 연료비 연동제 취지에 맞게 전기요금이 인상된 건 지난해 4분기 한 차례뿐이다. 문제는 이마저 정부가 ‘국민 생활안정’을 명목으로 지난해 1분기 연료비 조정단가를 kWh당 3원 인하한 것에 대한 원상복구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한전 부담을 줄이기 위해 연료비 연동제가 도입됐지만 정작 연료비 조정단가는 도입 1년 넘게 제자리걸음을 하며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는 평가다.
세종=이준형 기자 gilso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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