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경제 박선미 기자, 성기호 기자]빚으로 시작해 빚으로 끝난 한 해였다. 코로나19 장기화로 돈을 빌려 연명한 가계와 기업이 올해 급증했고 금융당국은 눈덩이처럼 불어난 가계부채를 막기 위해 역대급 고강도 규제들을 쏟아냈다. 당국의 주문에 하반기 대출 문이 급격하게 닫히면서 실수요자들은 대출 절벽에 내몰렸고 제도권 금융 문턱을 넘지 못한 취약계층들은 불법 사금융으로 향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기준금리 인상이 본격화되면서 주거비 및 생활비 마련을 위해 빚을 낸 서민은 물론 지난해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음), 빚투(빚내서 투자) 열풍에 과도하게 대출을 받은 차주들의 이자 부담도 현실화됐다. 부채의 역습이 시작된 것이다.
◆가계도 기업도 빚 내 버텼다=29일 한국은행 및 금융권에 따르면 올해 1~9월 가계부채(가계신용) 잔액은 1844조9000억원이다. 코로나19가 발발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9.7% 증가한 수치다. 가계부채 규모는 지난해 우리나라 실질 국민총생산(GDP) 규모 1836조원을 넘어섰다. 올해 9개월 간 늘어난 가계 빚만 117조원. 지난해 전체 증가분 127조원과 비슷한 규모다.
지난 2년간 코로나19가 지속되면서 불어난 가계부채는 244조원에 달한다. 가처분소득 대비 가계부채비율은 174.1%로 지난해 말 169.1% 보다 5%포인트 높아졌다.
지난해에도 가계부채 순증액은 매달 역대 최대 기록을 경신했다. 올해 역시 1월부터 가계대출은 큰 폭의 증가세로 시작했다. 코로나19 여파와 영끌, 빚투 열풍도 연초까지 이어졌다. 차이점이라면 금융당국이 영끌, 빚투를 막기 위해 강력한 대출 규제책을 잇따라 내놓으면서 하반기부터 증가폭이 둔화됐다는 것과 주거비가 급격하게 상승하며 주택 관련 대출이 폭증했다는 점이다. 주택담보대출의 전년 동기대비 증가율은 올해 1분기 8.5%, 2분기 8.6%, 3분기 8.8%로 상승세를 이어갔다. 반면 신용대출을 포함한 기타대출의 경우 하반기들어 영끌, 빚투를 위한 대출 차단에 증가율이 2분기 12.8%로 ‘꼭지’를 찍고 내림세를 이어갔다.
올해는 상호금융 등 비은행권을 중심으로 기업대출도 역대 최대로 늘었다. 코로나19 사태 장기화로 중소기업, 개인사업자 대출이 늘면서 기업대출은 3분기 말 1497조8000억원으로 전년 동기대비 12.4% 증가했다. 지난해 말과 비교해도 138조4000억원 폭증한 규모다.
특히 기업대출은 예금은행에서 1055조2000억원을 기록해 8.2% 증가율을 나타낸 데 비해 비은행금융기관에서 442조6000억원으로 상호금융(28.7%)을 중심으로 24.0%의 높은 증가율을 보였다. 가계대출 강화로 가계주택매입자금 수요의 일부가 주담대에서 임대사업자대출로 전환돼 비은행권 기업대출이 폭증하는 이상현상이 나타난 영향이다. 비은행 전체 대출에서 기업대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2015년 말 28.1%에서 올해 9월 말 48.2% 수준으로 급등했다.
◆"빚 때문에 잠 못자"…규제 칼날에 이자 폭탄까지=올해는 폭증한 가계부채가 무색할만큼 고강도 대출규제가 잇따라 나왔다. 특히 규제는 ‘대출 저승사자’로 불린 고승범 금융위원장이 취임하면서 본격화됐다. 8월 취임한 고 위원장은 1800조원을 넘어선 가계빚을 잡기 위해 강도 높은 총량규제(증가율 6%대 관리)라는 극약 처방을 내놓았다.
그 여파로 일부 은행들은 대출을 중단하거나 한도를 대폭 축소해야 했다. 지난 8월 부동산담보대출을 전면 중단한 NH농협은행을 시작으로 주요 시중은행들이 일부 신규대출 취급을 중단했다. 하지만 가계부채 증가세가 좀처럼 꺾이지 않자, 정부는 4월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차주별 적용 내용이 담긴 가계부채 관리 선진화 방안에 이어 10월 DSR 2·3단계 규제 조기 시행과 제2금융권 DSR 강화, 분할 상환 및 대출 심사 강화 방안을 발표한다.
당초 4월 대책에서는 내년 7월부터 총 대출액 2억원 초과, 2023년 7월부터는 총 대출액 1억원 초과로 DSR 규제 적용 대상을 점차 확대한다는 방침이었지만 가계부채 증가세를 잡기 위해 2단계 DSR은 6개월, 3단계 DSR은 1년 앞당겨 시행하기로 했다.
두 번의 기준금리 인상에 대출규제까지 겹쳐 차주들은 이자폭탄을 떠안아야 하는 부작용을 마주하고 있다. 신규 가계대출 가운데 변동금리 대출 비중은 80%에 이르는데, 지난 10월 기준 예금은행의 가계대출(신규) 가중평균금리는 연 3.46%로 지난해 말 2.79% 대비 1%포인트 가까이 올랐다. 일부 은행 주택담보대출, 신용대출 금리는 연 5~6% 수준까지 치솟은 상태다.
시중은행이 갑자기 대출을 조인탓에 제2금융권 대출이 폭증한 풍선효과가 나타난 것도 올해 금융권이 예의주시하는 대출증가 리스크 중 하나로 꼽힌다. 가계대출의 경우 은행권 전년동기대비 대출 증가율이 3분기 9.9%를 기록하는 동안 비은행은 10.8%로 더 높아졌다. 코로나19 발생 이전인 2019년 말만 해도 은행 가계대출 증가율은 7.7%, 비은행은 -0.7%로 확연한 차이를 나타냈다.
전문가들은 올해 가계부채 관리에 낙제점을 줬다. 오정근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올해는 가계대출을 억제한다는 목적으로 총량을 규제한 것이 정책의 뼈대였는데, 근본적 원인을 해소하지 못했다"며 "서민들은 생계자금이나 사업자금 융통의 애로 때문에 고금리 불법사금융 쪽에 내몰렸고 이는 앞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평가했다.
박선미 기자 psm82@asiae.co.kr
성기호 기자 kihoyey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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