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경제 이광호 기자, 기하영 기자]대기업에 재직 중인 정우철씨(42·가명)는 내년 집안의 여러 행사를 앞두고 대출을 받으려다 충격을 받았다. 주거래은행인 인터넷전문은행에서 신용도가 높다는 이유로 대출이 거절됐기 때문이다. 다른 은행에서도 1등급의 신용도를 문제삼아 요청한 대출 한도에 훨씬 못 미치는 액수를 책정했다. 정씨는 "연체 등을 신경 써 신용점수를 꼼꼼하게 관리해왔는데 등급이 높은 게 오히려 독이 되니 이해가 안된다”며 “점수가 낮은 중·저신용자보다 갚을 능력이 있는 1등급이 왜 역차별을 받아야 되냐”고 하소연했다.
금융당국이 내년 강도높은 가계부채 관리를 예고한 가운데 고신용자들의 불만이 극에 달하고 있다. 신용평가사 신용점수가 900점을 초과하는 고신용자들의 대출 총량은 내년에도 더욱 옥죄는 반면 실수요자 구제책을 명분삼아 중·저신용자 대출은 느슨하게 풀어줄 예정에서다. 일각에서는 금융 시장의 상식을 역행하는 데다 건전성 차원에서도 규제의 방향성이 맞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고신용자, 대출 문턱 높아지고 카드론 금리 급등21일 금융권에 따르면 금융당국의 강력한 대출 규제에 인터넷전문은행들이 고신용자 대출을 대폭 축소하고 중·저신용자 대출 혜택을 확대하고 있다. 고신용자 대상 신규 대출, 마이너스통장 가입을 제한하거나 대출금리를 올리는 식으로 문턱을 높인 것이다. 케이뱅크, 카카오뱅크, 토스뱅크는 각각 20.8%, 21.5%, 34.9% 중·저신용자 올해 대출 목표치를 세웠지만, 이를 충족하기 어려워지면서 내년에도 같은 기조를 유지할 것으로 관측된다.
시중은행들 역시 고소득·고신용자의 대출 총량을 줄이는 대신 중·저신용자에 대한 대출을 대폭 늘리기로 했다. 신용도가 높을수록 금리가 싼 은행에서 돈을 빌리기가 어려워질 것이라는 얘기다.
신용카드사의 장기카드대출(카드론) 역시 고신용자 중심으로 금리가 오르는 추세다. 최근 3개월간 표준등급 1~2등급에 속하는 고신용자의 카드론 금리는 최대 2%포인트 가까이 높아졌다. 지난달 7개 전업카드사(신한·삼성·KB국민·현대·롯데·우리·하나카드)의 표준등급 기준 1~2등급 카드론 평균금리(운영가격)는 8.11~13.48%를 기록했다. 7개 전업카드사 중 4곳이 지난 9월보다 1~2등급 카드론 평균금리가 올랐다.
삼성카드가 지난 9월 9.86%에서 지난달 11.94%로 2.08%포인트 급등했다. 같은 기간 현대카드 역시 10.38%에서 11.36%로 0.98%포인트 올랐다. 이는 우대금리, 특판금리할인 등 기준가격에서 조정하는 조정금리 인하폭이 줄어든 결과다. 즉 카드사들이 대출관리를 강화하면서 금리할인 등 마케팅을 줄였다는 얘기다. 특히 지난해 말(6.64~12.44%)과 비교하면 하단은 1.47%포인트, 상단은 1.04%포인트 금리가 올랐다. 지난해만해도 1~2등급 고신용자에게는 최대 5% 가까운 금리할인이 있었다.
카드업계 관계자는 "금융당국의 가계대출 규제 강화로 고신용자의 카드론 금리를 올릴 수 밖에 없는 상황"며 "규제 강화에다 기준금리 인상 등의 영향으로 내년 카드론 금리도 계속 오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일각에서는 ‘집값 잡기’나 빚투를 막기 위한 수단으로 고신용자를 옥죄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출 실수요자를 신용도와 소득에 따라 나눠 시장 질서에 맞지 않게 대출 시장이 왜곡되고 있다는 것이다.

금융당국 "고신용자 불리하지 않을 것"…전문가들은 '우려'금융당국은 ‘체감’일 뿐 실제로 내년에 이어질 가계대출 총량 관리나 차주별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제도 자체가 고신용자에게 불리하게 적용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입장이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신용등급만 따져 1∼5등급은 대출을 내주지 않고 6등급부터 내준다면 역차별이겠지만, 중·저신용자 대출은 금리도 상대적으로 높고 한도도 낮은 편이라 고신용·고소득자에게 불리할 것은 없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 교수는 "기본적으로 능력과 신용도에 따라 소득과 상환능력이 있는 차주에게 대출을 내주는 게 맞다"며 "역차별 논란이 나오는 것은 서민들의 경우 재정 지원으로 풀어야하는데, 모든 것을 금융 지원으로 접근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한 자영업자 커뮤니티에서는 정부 지원 대출을 받기 위해 신용점수를 일부러 떨어뜨리는 방법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특히 최근 총량규제 풍선효과로 은행에서 밀려난 1~2등급 고신용자들이 2금융권 문을 두드리고 나서는 기현상도 벌어지고 있다.
금융권 관계자는 "능력이 충분한 사람에게는 돈을 빌려주지 말고 어려운 이들에게만 대출을 내주라는 것은 금융의 기본논리로 설명이 안 되는 일"이라며 "금융사 입장에서는 부실대출 비율이 크게 올라갈 우려가 있다"고 꼬집었다.
이광호 기자 kwang@asiae.co.kr
기하영 기자 hykii@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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